인간의 생(生)에는 사랑과 혁명뿐이다. 어떤 문고본에서 보았던 글귀다. 저 앞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유쾌했던 뉘앙스는 아닌 것은 분명했다. 나는 밤만 되면 온몸에 열이 오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신체의 온도가 정말 뜨거워진다는 말이다. 체온계로 정밀하게 열을 잰 적은 없다만, 눈덩이가 뜨거워지고, 머리가 뿌연 우유로 가득 채워지는 멍한 기분이,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눅눅한 이불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한 채 추상적인 사유들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그러다 가끔씩 간신히 손을 뻗어 의도치 않은 기억을 건지기도 하는데, 오늘은 낡은 문고본에 적혀있던 그 글귀였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간다나. 내게 그 글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면, 나의 대답은 모름이다.
어둠이 짙어지면 체온은 더 높아진다. 열이 일정한 기준을 넘어 포화점에 달하면, 숨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 열로 인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났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성인이 된 이후에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정확한 시발점은 추정하기 어렵다. 젊은 패기로 술을 너무 마신 탓일까. 식사는 소중히 여기지 않고, 오로지 쾌락에 눈이 멀었던 탓일까. 원인이 있다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고, 이유가 없다면 그저 우연에 의해서 일 것이다.
중학생 시절, 이렇게 열이 났던 적이 있더랬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원인 불명의 신체 이상은 아니었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짝사랑이었다. 짝사랑.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과 열의 관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의 대상은 같은 학교 한 소녀였다. 자그마한 키와 손과 발, 단발머리, 짙은 눈썹, 눈과 콧방울은 동그랗게 생긴,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귀여운 스타일의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내 친구의 친구였다. 친구를 만날 때 가끔 그녀도 함께 동석한 적이 있었는데, 흐릿한 인사만 나눴고,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녀는 동네에서는 유명한 밴드부 보컬이었다. 그러니까, 셀 순 없지만, 꽤나 다수의 남학생들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그러했다. 그리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특히 나와 그녀는 반이 달랐지만, 친구 덕에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런 상황은 나의 마음을 더욱 한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짙은 외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은 애처로운 마음과 동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종착지를 가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라, 그녀는 밴드부 보컬이자, 귀여운 스타일이자, 꽤나 유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당연하게도 여러 남학생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가 교제했었던 전 애인들을 보면 -학교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정보를 알게 된다.-, 키도 크고, 외모도 빛나는, 한 송이 꽃 같은 청춘들이었다. 거기에 비해 나는 따뜻한 햇살이 부담스러운 바위에 매달린 그림자··· 그 아래에 붙어 있는 이끼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매일 밤 열이 안 날 수가 있는가. 그녀는 햇살이었다. 햇빛이 닿을 때마다, 서늘하게 식었던 이끼는 뜨겁게 타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열이 오르면 몸이 무거워진다. 뜨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냉수 한잔을 따라 마셨다. 열이 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근육이 쑤셔 힘이 들지만, 냉수를 마실 때는 꽤나 기분이 좋다. 머리부터 식도와 발끝까지 열이 감싸고 있는데, 그곳에 아주 차가운 물이 입을 통해 열을 달래준다.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물의 이동 경로가 다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든다. 나는 이불에 눕지 않고, 창문 앞에 있는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바람 한 올 내게 닿지는 않지만, 세상의 냉기가 유리를 넘어 느껴졌다. 아주 차갑고 잔인한 기운이었다.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녀와 나는 어떻게 되었더라. 나는 그녀와 연애를 했었다. 16살 때였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햇살에 비친 이끼라. 나는 혼자 쿡쿡 웃어댔다. 그런 적도 있었더랬지. 16살의 연애 이야기는 언젠가 사유의 흐름에 우연히 마주치면 다시 해야겠다. 지금은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이다. 두꺼운 유리창에서 느껴지는 그 냉기가 너무 날카로워 견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