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24년

존경심을 담은 미숙한 끄적임

by 무긴이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번개가 치고 노을이 졌다. 바람이 불었고 강물은 세차게 흘렀다. 하늘에는 어둠이 잔뜩 묻어있다. 소리는 그림자 뒤에 숨었고, 커피는 차갑게 식었다.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공허한 허공이 얹어져 있다. 나는 주름진 진한 감색의 등받이를 응시하고 있다. 의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머그잔은 요동치고 있다. 심장은 차분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마지막 눈물은 두 번째 이별이었다. 공백은 서서히 고통으로 이어졌다. 지구는 등을 돌렸고, 달은 기울었다. 냉소적인 하얀 달이었다. 달은 차오르지 않을 것이다. 소년 시절 보았던 달처럼.


종로의 빛은 꺼질 줄을 모른다. 빛 덩어리는 한데 모여 추상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내 걸음은 온갖 색들을 지나쳐 어둡고 허름한 간판에서 멈추었다. 현대라는 도시에 퍽 어울리지 않는 색 바랜 식당이었다. 구닥다리 형광등이 공간을 더욱 민망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앉아 있는 두 남자도 그러했다. 오히려 칙칙한 색감의 사물들이 낯설지 않았다. 우리 셋은 술 잔을 함께 기울었다. 내 앞에 있는 자는 40세의 중년 남성으로 미묘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나이를 밝히지 않았다면, 25세부터 50세 정도로 보일 것이다. 나는 그와 이곳에서 처음 만났지만, 어쩐지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그와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초록의 소주를 홀짝이며 문 밖의 형형색색의 거리를 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에 일어나 내 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었다. 평소였으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술에 취해있었고, 고독했다. 술동무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내게 먼저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그도 내가 아닌 아무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리라.


다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술을 마실 때를 빼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낭떠러지에서 구른 듯한 더럽혀진 코트를 입고 있을 뿐이다. 그는 아마도 거지일 것이다. 한푼도 없는 슬픔에 잠긴 사내일 것이리라. 우리의 대화가 계속되어도 그는 웅크리고 술잔을 바라보고 있다. 잔 안에 자신이 과거에 놓고 온 소중한 시간이 들어있는 것 마냥.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후회만이 잔을 가득 채우고 있다. 술자리가 마무리 될 때쯤, 거지 사내는 입을 열었다. 자신이 한잔 살 테니, 자신과 함께 있어달라고 하였다. 나는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 자신의 아내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보험금이 오늘 자신의 통장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한밤의 종로는 모든 색깔들로 가득했다. 멋쟁이들의 색, 현대문명의 색, 자본주의 색, 탐욕의 색 같은 거 말이다. 우리는 다음 술집을 찾기 위해 그곳을 거닐었다. 우리는 마치 그늘 같았다. 고운 꽃들 사이를 존재감 없이 휘젓고 다니는 먼지의 그림자. 종로는 더 이상 우리에게 의자를 내줄 수 없는 곳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을 터였다. 인정이 있었고, 인간이 있었고, 비렁뱅이가 있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자신의 집을 떠나는 갈매기와 마찬가지로. 나는 날 수는 없어도 바람을 타고 서서히 그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슬픔에 잠긴 그가 옷깃을 붙잡기 전까지는. 미묘한 생김새의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 그의 주름진 미간도, 그의 간절한 손길도 말이다. 이곳은 종로다. 모든 것이 멈출 수 없는 도시다. 나는 그곳에 그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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