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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일살이

수술, 병원 밥 그리고 퇴원

by 미지수

0917 잠 좀 자고 싶다.

밤새 옆 침대 할머니가 코를 골고 시끄럽게 굴어서 잠을 설쳤다. 얼마나 심했으면 간호사 벨을 눌러서 귀마개를 받았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귀마개가 빠져 코 고는 소리에 다시 깼다. 오후에 예정된 수술 때문에 아침밥은 없었다. 열한 시 반 정도에 간호사님이 오셔서 알약 반개를 주시며 이걸 먹고 잠시 후 수술 방으로 간다고 하셨다. 파트너한테 전화를 하고 알약을 삼켰다. 몽롱한 상태로 누워있는데 누군가 내 침대를 밀어서 수술실 입구로 들어갔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니 중년 여성 간호사 두 분이 나를 들여다보시더니 마취약이 들어갈 주삿바늘을 꽂고, 심장박동 체크하는 스티커를 달아주셨다. 두 분 다 너무 상냥하셨는데 내가 독일어를 잘 모르니까 영어로 좋은 꿈, 아름다운 꿈을 꾸라고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거라고 하시며 지금 마취제가 들어갈 거니까 조금 다급하게 ‘지금’ 좋은 꿈을 시작하라고 하셔서 집에 있는 우리 강아지를 생각하려고 애쓰다가 잠이 들었고, 아무 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취에서 깰 때까지 있는 곳에서 눈을 떴다. 무슨 소리가 들리고 누가 왔다 갔다 하면서 내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직 해롱해롱 한 상태였는데 파트너한테 전화해야 한다고 얘기한 기억이 난다. 간호사분이 밖에서 기다릴 수도 있다고 하기에 아직 전화를 안 했다고 했다. 내가 자꾸 전화해야 된다고 하니 얼추 깬 거 같았나 내 병실로 옮겨졌다.


내 자리에 두고 온 폰을 들어보니 배터리가 3% 남아있었다. 파트너한테 수술이 끝났으니 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아직 어질어질해서 읽는 건 무리였고 오타를 내며 문자를 보내고는 또 자다 깨다 하며 누워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파트너가 도착해서 얘를 붙들고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는지 구구절절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댔다. 너무 힘들어서 진통제를 달라고 했는데 이미 진통제가 많이 들어갔고 체구도 작은데 너무 많이 쓰면 위험할까 봐 걱정된다며 늦게 갖다 주셨다.


수술 전에는 목발을 짚고 화장실을 갈 수 있었는데 수술 직후에는 너무 어지럽고 아프고 정신이 없어서 간호사 벨을 눌러 누군가 휠체어를 밀어줘야 했다. 비어있던 자리에 새로 들어온 할머니가 코를 너무 골아서 귀마개를 꼈는데 할머니 보호자가 오더니 할머니한테 뭐라고 하는데 귀마개를 뚫을 정도로 너무 쩌렁쩌렁하게 오랫동안 말을 해서 머리가 아파져 편히 잘 수도 없었다.


0918 빵 주지 마세요 제발

영어도 잘하고 친절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뽀글 머리 간호사님이 화장실까지 휠체어를 밀어주셨다. 아침 회진 시간에 의사 선생님이 와서 붕대를 열고 다리를 보더니 수술부위에 끼워져 피가 나오던 호스를 확 빼버리고는 수술부위를 소독하고 반창고를 갈았다. 수술부위 주변에 시퍼런 소독약이 범벅이 되어있어서 스머프 피부색 같았다. 손목에 주삿바늘이 불편해서 이거 필요한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면서 빼라고 했는데 옆에 간호사가 “나중에, 나중에” 이러고 안 빼주고 갔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진통제를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고, 일단 통증을 견디고 있어서 그런가 사소한 것들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뽀글 머리 간호사분이 아침을 가져다주실 때 주삿바늘 좀 제발 빼 달라고 했더니 곧 빼주셨다. 아침은 맨 처음에 메뉴가 쓰여 있는 종이를 주면서 먹고 싶은 것을 체크하라고 했던 그 메뉴를 매일 똑같이 줬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빵을 좋아해 ‘빵순이’라고 불릴 때가 있었는데, 알약을 잘못 먹고 속이 뒤집어진 이후로는 무겁고 단단한 독일빵은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차도 마시기 힘들어서 사과랑 키위만 먹었다.


재활치료사가 플라스틱으로 돼서 신고 벗을 수 있는 깁스 부츠를 가지고 와서 그걸 신고 목발을 짚고 복도에 있는 체중계까지 걸어가서 수술한 발에 15킬로 까지 체중을 싣는 걸 재보고 나서 목발을 가지고 계단 오르락내리락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비건이라고 따로 음식을 만들어서 주는 건 정말 감사한데 음식들이 다 너무 짜고 기름지고 빵을 자꾸 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배는 고픈데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 못 먹고 있으니 파트너가 집에서 죽을 끓여왔다. 마가렛은 내 수술 날 퇴원했고, 새로 온 할머니는 수술실에 갔기에 방에는 나밖에 없어서 파트너가 왔는데 융통성 없는 직원이 입구에서 파트너한테 방문시간이 아니라며 못 들어오게 했고, 파트너는 그럼 죽이라도 올려 보내게 해달라고 해서 간호사가 죽을 가져다주었다. 간호사한테 말했더니 들어와도 되는데 이상하다고 해서 말 좀 해달라고 했다.


일단 죽을 조금 먹고 있으니 이따가 파트너가 들어왔다. 안 그래도 아파서 서러워 죽겠는데 이게 무슨 이산가족 상봉인지... 퇴원하고 싶다. 힘들다...


병원밥 1
병원밥 2
1F46C72D-C8AE-4E13-B179-8EA55F671A94.heic 독일 빵 누룽지... 이렇게 줄 때면 차만 마셨다...



0919

아유 수술한 다리는 심장보다 높이 두는 게 좋다고 그래서 블록 같은 것 위에 다리를 올려두니까 무릎이 아프고, 계속 누워있으니까 허리도 아파서 깼다. 내가 빵을 도저히 못 먹겠다고 혹시 아침에 귀리죽을 받을 수도 있냐고 물었더니 그건 사보험 환자들 용이라고 어쩌고 하더니 그다음부터는 아침에 포리지를 주었다. 이건 먹을 만하다.


나는 빵을 주지 말라고 매일같이 말하는데 한두 번 안 나오다가는 또 빵이 나온다. 빵 대신 건조한 비스킷 같은 게 나오기도 한다. 나한텐 그게 그거고 비스킷은 심지어 플라스틱 포장이고 너무 건조하고 딱딱해서 손도 안 대는데도 자꾸 준다. 거기에 발라먹으라고 스프레드랑 마가린, 잼도 자꾸 준다. 차라리 과일이나 샐러드를 줬으면 좋겠는데...


생각해보니 이 사람들한테 빵은 우리한테 쌀밥이랑 비슷한 느낌이라 “아이고... 밥을 안 먹으면 어째? 뭐? 쌀밥을 안 먹는다고? 그럼 누룽지를 줘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자꾸 빵이랑 비스킷을 챙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0920

여기 병원에서 내가 만난 의사들은 다들 영어를 잘한다. 간호사는 반반인 것 같다. 내일 아침에 퇴원시켜준다고 물리치료사랑 정형외과를 동네에서 찾으라고 했다. 이날은 특히 의사 레지던트 간호사 여러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향수 냄새가 너무 진해서 또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자꾸 여기 음식을 못 먹어서 파트너가 죽을 싸오니까 입구에서 어떤 직원이 자기들 음식이 잘 나오는데 뭐가 어때서 그러냐는 식으로 뭐라고 했단다. 따로 만들어서 챙겨주는 건 정말 너무너무 감사한데 제 입맛에 안 맞는 것뿐입니다... 한국인은 아플 때 그냥 쌀죽에 간장 조금 참기름 조금 김가루를 뿌려서 먹고 싶습니다...


플라스틱 깁스 회사에서 나온 사람이 이거 삼 개월 대여이고 나중에 반납할 지점이 적힌 종이를 보여주고 사용법을 알려주며 사인을 받았다. 내가 이름을 쓰자 한국어임을 알아보았다. 내가 놀라며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오래전 만났던 애인이 한국 혼혈이고 한글을 좀 배운 적도 있단다.


또 어디를 가는데 내 이름 발음을 찰지게 잘하는 금발 독일인이 데리러 왔다. 지난번에도 엘리베이터 앞까지 갔다가 마스크를 까먹은 걸 깨닫고는 마스크를 가져다주었는데 이번에도 똑같았다. 마스크를 가지러 간 사이 뽀글 머리 간호사가 지나가길래 파트너가 올 건데 내가 폰을 놓고 와서 혹시 내가 너무 늦으면 어디 갔다고 설명해줄 수 있냐고 했더니 알겠다고 "너 엑스레이 찍으러 간다고 알려줄게~" 이러고 갔다. 엑스레이 찍으러 가는지 이때 알았다.


엑스레이를 찍고 밖에서 기다리는데 데려다주는 사람이 늦었다. 기다리다가 나 혼자 그냥 휠체어 밀고 갈까 하다가 그러다가 길을 잃을까 봐 일단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직원은 안 오고 파트너가 데리러 와서 같이 병실로 돌아갔다. 이날은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왔는데 역시 난 한국인인가 보다. 느글느글한 음식만 보다가 김치볶음밥을 먹으니 속이 다 시원하고 너무 맛있었다.


0921

오전 회진 때 의사가 와서 상처 반창고를 갈아줄 때 내가 이거 다리 밑에 까는 것 때문에 무릎이 아픈 것 같다고 했더니 이제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베개를 말하는 거냐고 하길래 아니 그 밑에 꺼요 라고 했다가 님 집에 그거 없지 않냐는 소리를 들었다. 허허 민망하게. 그냥 부드러운 베개나 쿠션 같은 걸 깔면 된다고 했다. 집에 가서 시퍼런 발을 씻어도 된다고 허락도 받았다. 간호사가 퇴원수속 서류 가져다주면 집에 가도 된다고 했다.


얼마 뒤 직원이 종이봉투를 가져다줬다. 열어봤더니 엑스레이 사진이 있었는데 아니... 뭐 이렇게 큰 철판이랑 나사를 이렇게 많이 박아놨나 충격적이었다. 일 년 뒤에 다시 열어서 철판이랑 나사 꺼내야 된다고 아빠한테 말했다가 철사가 몸에 있는 상태로 다치면 훨씬 심하게 다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최대한 빨리 내 몸속에서 제거해버리고 싶어졌다. 파트너가 와서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한국이었다면 병원에서 더 오래 있으면서 물리치료를 받았을 것 같지만 잠도 편히 못 자고 밥도 입맛에 안 맞으니 빨리 집에 가고만 싶었다.


CB457BD3-A9C8-438E-BCE2-4CA80DB75129_1_201_a.jpeg 충격의 엑스레이

+ 병원에 누워있으면 뜨개 할 시간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해 뜨개 거리를 가져갔지만 수술하고 나서는 아파서 그냥 누워서 자다 깨다 하다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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