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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수 Feb 21. 2022

런던 동네 주민

이스트런던 브릭 레인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이스트런던 특히 브릭 레인이 있는 쇼디치 지역은 비건 친화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주변에는 비건 식당이 많은 것은 물론 비건 컵케이크 가게, 비건 커뮤니티 카페와 비건 타투 스튜디오도 있고, 근처에 있는 오래된 양조장이었던 건물에서는 토요일마다 비건 푸드코트, 정기적으로 열리는 커다란 비건 파티 행사가 열린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추리닝을 입은 키 큰 남자가 한 손에 트레이를 들고 그 위에 놓인 작은 컵에 담긴 스무디를 먹어보라고 했다. 당시 나는 비건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지금보다 훨씬 더 비거니즘에 열정적이었다. 


“이거 비건인가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요거트가 들어가긴 했지만 아주 조금 들어갔으니 괜찮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안 괜찮은데요. 나보고 비건이냐고 물어보고는 다음에는 스무디를 꼭 비건으로 만들어오겠다고 말했다. 자기는 요 옆 공간에서 아프리카 댄스 수업을 하려고 준비 중이라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스무디를 먹어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는 비건에 관심이 있는데 도와줄 수 있냐며 내 번호를 물어봤다.


음... 

그렇다면 내가 비거니즘에 대한 자료를 몇 가지 보내주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보내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최대한 자제했다. 그럼에도 걔는 내가 보내준 자료를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확인하지 않았다.


넷플릭스에 있는 <What the Health>를 추천했더니 같이 보자고 했다. 한 명이라도 더 비건에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승낙했다. 어릴 때 시에라리온에서 이민을 왔다는 그는 무슬림 나라에서 흔하디 흔한 무하마드 같은 이름을 가졌다. 매일 짐에 가서 운동을 하고 가능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그는 키도 덩치도 컸는데 얼굴은 착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억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무하마드는 자꾸 딴짓과 딴소리를 하며 산만하게 다큐멘터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까불거렸다. 조금 짜증이 났지만 참고, 영상을 건너뛰기하며 내가 직접 간추린 내용 설명을 해줬다. 마지막에 운동선수들이 나오는 부분이 돼서야 걔는 잠깐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고 영화는 끝났다. 이때는 <게임 체인저스> 다큐가 아직 없었다. 그때 본 다큐가 <게임 체인저스>였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너 비건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한 거 진심이야? 거짓말이지?”


걔는 맞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참나. 자신은 어차피 소나 돼지는 안 먹고 닭만 먹는다고 했다. 마지막에 나온 운동선수들을 보고 자극을 받았는지 조금씩 동물 섭취를 더 줄여보겠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


비건이 아닌 사람과 만나는 것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노력을 한다고 말은 했지만 내가 있는데서 걔는 닭을 먹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 않았다. 사람이 나쁘진 않은데 아주 좋지도 않았다. 거짓말을 한 게 괘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친해졌다고 착각한 건지 점점 더 심하게 깐족거렸다.


한국에 이주 간 다녀온 사이 내가 걔의 깐족거림을 잊었는지 다시 만났다. 감기 기운이 드는 것 같아 레몬을 짜서 레몬 물을 마시려는데 걔가 꿀이 어쩌고 얘기를 했다. 


“꿀은 비건 아니야. 꿀 때문에 벌들이 착취당하거든. 몇 년 새 벌들이 얼마나 죽어나가는지 들어봤어?”


“벌들 좀 죽어도 돼.”


...... 

샹욕이 나왔다. 니가 미쳤냐고, 말하는 싸가지 보라고. 너 이 새끼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아마 그다음에 걔가 사과를 했던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만약 <게임 체인저스>를 같이 봐서 걔가 비건이 되었다고 해도 별로 더 오래 만났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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