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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수 Mar 28. 2022

런던 직장생활

하우스 메이트 카리에게 소개받은 이스트런던의 개인 브랜드 로드샵에서 일 년 넘게 일했다. 일층에 매장이 있고, 같은 건물 삼층에 사무실이 있다. 멀지 않은 거리에 두 번째 매장이 있다. 크지 않은 두 매장은 보통 한 사람이 본다. 디자이너 겸 사장인 H는 보통 사무실로 출근하고 파트너 S와 함께 일 년에 한두 번 중국이나 인도로 출장을 간다. 매장에서는 자체 브랜드의 의류와 가방과 함께 중국 시장에서 떼어온 벨트나 액세서리, 다른 브랜드의 향초나 주얼리도 판매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다 좋고, 비건 프렌들리 한 동네에 있으며, 하는 일도 괜찮았다. 매장에 동물 털옷과 가죽제품이 있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재고나 상품관리는 사장이 하고, 나는 사장이랑 자주 만나니까 내가 잘 설득하면 동물성 재료 사용을 줄여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료 크리스티나랑 얘기를 하다가 그도 비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카리도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으니 직원 세 명이 다 비건이었다. 사장들은 회식을 해도 꼭 비건 옵션이 있는 곳으로 가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비건에 크루얼티 프리를 챙겨주었다.(화장품 세트였는데 비건 크루얼티 프리 표시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니 믿었다.) 


몇 달 뒤, 그만두는 크리스티나의 자리에 나오미가 들어왔다. 나오미는 강아지를 너무 좋아해서 개 산책 앱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의 개를 산책시키는 알바를 가끔 한다. 한 번은 나오미랑 같이 내 최애 비건 식당에 가서 팟타이를 먹었고, 종종 사무실로 배달시켜 먹기도 했다. 그는 같이 사는 남자 친구가 자꾸 동물성 재료를 요리하고 같이 먹기를 원해 집에서는 비건으로 먹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비거니즘을 이해하고 최대한 노력하려고 했다.


탑샵 플래그쉽 스토어에 세 번째 매장이 들어가고, 직원이 두세 명 늘어난 어느 여름날, 사장들은 바비큐 회식을 제안하고는 우리에게 구워 먹고 싶은 걸 물었다. 버섯, 파프리카, 감자, 아스파라거스, 브로콜리, 가지, 고구마, 옥수수를 구워 먹으면 맛있으니 그중 몇 가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사장들은 그걸 다 사 왔다. 아마 ‘채소를 먹고 무슨 배가 차겠니’하는 마음으로 그 많은 양을 사 온 듯하다. 재료들을 손질하고 양념해 오븐에도 굽고, 꼬치에 꽂아 그릴에도 구웠다. 교차오염까지 신경 써 비건 재료를 다 구울 때까지 육식 재료를 꺼내지 않았다. 먼저 구운 채소와 버섯을 먹고 배가 불러진 그들은 육식 재료를 별로 먹지 못했다.


카리의 송별회 때는 다 같이 비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새로 생긴 비건 식당에 갔다. 요즘 핫하고 맛있는 곳이라고만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카리의 마지막 회식이니 비건 식당에 가자고 했던 것도 같다. 아무튼 다 같이 앉아서 거의 모든 메뉴를 시켜 나누어 먹었다. H는 난생처음으로 비건 버거를 맛보았다. 말로는 그냥 그렇다고 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맛있는 걸 먹을 때 자연스레 나오는 기쁨의 몸 흔들 춤을 추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나고 자란 중년 여성인 H는 동물 털로 만든 퍼 코트와 가죽제품을 좋아한다. H는 비건인 우리를 잘 챙겨줬지만 매장에 들어온 손님이 동물 털코트랑 동물 가죽제품을 보고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런 걸 파느냐고 했다던가, 앞으로 세계적 브랜드에서 동물 털코트를 금지하기로 했다는 뉴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불편해했다. 털코트는 따뜻하고 멋진 패션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굳게 자리 잡은 그는 털코트가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한 번은 내가 이 털은 어떤 동물의 것이냐고 물었더니 몽골 염소의 것이며 가죽을 벗겨 죽이지 않고 털만 자른다고 설명했다. 그 털 사이를 들여다보니 가죽이 있었다. 과연 이게 동물을 죽이지 않은 것인지 믿을 수 없었다. 혹여나 그 몽골 염소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이 가죽의 동물은 죽었으니까. 


나중에 들은 바로는 복슬복슬한 털코트를 자주 입고 다니던 H가 런던 거리에서 동물권 활동가한테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이 털코트를 입고 다녔지만. 아무튼, 그에게도 나름의 상처가 있었다는 걸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다들 혼자 일하기에 매장이 한가하거나 배가 고플 때 잠시 매장 문을 잠가 놓고 30분 정도 점심시간을 가져서 보통 혼자 밥을 먹었다. 나는 대부분 도시락을 싸가서 주로 사무실이나 날씨가 좋은 날이면 건물 뒤 공원에 앉아서 먹었다. 근처에 비건 식당이 많아서 사 먹기는 쉬웠으나 걸어서 오가고, 음식이 준비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해서 주변의 비건 식당은 일 끝나고 친구들과 갔다.


간식이 필요하면 매장 바로 앞 편의점에는 여러 종류의 식물성 음료와 비건 감자칩이 있었고, 걸어서 5분 거리 이내에는 과일과 채소, 후무스, 빵, 비건 과자가 있는 슈퍼마켓,  비건 컵케이크 가게비건 옵션이 있는 도넛 가게, 쿠키, 케이크를 파는 비건 카페, 비건 버거 가게도 있어서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도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참 좋았다.


매달 100파운드 이내로 유니폼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비건 직원들이 동물성 재료가 들어간 걸 안 입으니 겨울엔 양털이 들어가지 않은 니트 제품도 여럿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재료가 플라스틱이라 아주 좋은 대안은 아니었지만 당시엔 비건이라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사람들의 인식과 세상이 변할수록 동물 털코트는 내놓기 어렵게 되었지만 잘 팔리는 가죽 가방은 계속 만들었다. 남자 사장 S는 유기농 면제품을 늘려갈 계획을 이야기했다.


비건이 되고 새삼 의류업계가 끼치는 환경오염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일할 때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건 하루에 최소 커다란 쓰레기봉투 하나를 꽉 채우는 옷이나 물건에 개별 포장된 플라스틱 봉투였다. 내가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와 그만두던 시점의 매장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의 동물 착취와 환경오염을 비교해본다면 뭔가 더 나아졌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이야기했고, 사장들 마음 어딘가에 비거니즘의 작은 조각들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다시 의류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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