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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강요하지 마세요?

by 미지수


비건들이 많이 듣는 말이 있다.

"나한테 비건 강요하지 마 이건 내 개인의 선택이야"

비건은 비건이 아닌 사람에게 "비건하세요." 라는 말을 하지도 않는데 어떤 말을 하기도 전부터 나한테 비건 강요하지 마 라는 말을 듣는다. 내가 비건이라고 말하거나 내가 비건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어디서 내가 비건인걸 듣고 나에게 와서는 나는 그런 거 못한다. 비건 강요하지 말아라. 이런 말을 한다.


보통 "강요"라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동사

「…에/에게 … 을,…에/에게 - 기를,…에/에게 -고,…에/에게 -도록」

억지로 또는 강제로 요구하다.


내가 받아들이기에 강요란 강요를 하는 사람이 어린아이의 보호자처럼 경제적, 물질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너는 내가 주는 것을 먹고, 입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라고 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강요라는 말은 강요를 받는 입장이 그 "강요"를 무시할 수 있는 상태라면 성립할 수 없다. 진짜 강요를 당하는 입장이라면 과연 강요하지 말라고 말하기가 쉬울까? 그냥 내가 듣기 싫은 말을 하는 것은 강요가 아니다.


아니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에 사람들을 가두고 계속해서 비거니즘 다큐멘터리와 영화, 강의들을 시청해야만 밥을 준다거나, 그 안에서 제공되는 모든 음식은 비건일 경우에나 그나마 "비건강요"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가둔다는 사실만 빼면 본인의 건강에 매우 이득이 된다. 2형 당뇨는 자연식물식만으로 치료가 가능하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지면 혈관이 깨끗해지며, 심장병과 암등 각종 성인병의 가능성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낮아진다.


비건 만들기 수감생활이 존재한다면 어떨까라는 상상도 해봤다. 말이 수감생활이지 그냥 숙소를 제공하고 정해진 구역 안에서 하고 싶은걸 자유롭게 한다. 영상실에서는 비거니즘 다큐, 영화, 강의가 계속 나오고 궁금하면 보고 아니면 말고. 밥을 먹을 때가 되면 본인이 먹을 것은 본인이 직접 채소와 과일을 채집하고, 동물을 먹고 싶다면 동물을 직접 잡아서 죽여서 만들어서 먹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가 죽인 동물을 나눠먹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엔 각종 곡식, 채소와 과일은 풍부하다. 그 안에는 정육점은 없다. 도살장은 굳이 직접 살육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사용할 수 있다. 들판엔 행복하고 자유롭게 뛰어노는 동물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동거 동물들과 산책하고 뛰어노는 것처럼 그 동물들과 뛰어놀 수도 있고 교감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곡식, 과일, 채소가 풍부하게 주어졌을 때, 그 식물들만 먹고도 충분히 배부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굳이 "먹고 싶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직접 동물을 죽여서 먹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비건이 아닌 사람들은 비건을 보면 양심이 찔리는 것 같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처럼 비건은 가만히 있어도 존재만으로 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나 보다. 하지만 진짜 육식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비건이 아니다. 바로 육식주의속 자신들이다.


-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남들이 그러는 것처럼 동물을 먹음

-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동물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

- 하지만 변화가 두렵고, 새로운 것이 두렵고, 모르는 것이 두렵고,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음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책감을 느낌

- 비건은 동물을 먹지 않기 때문에 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 보여 미움

- (비건들이 육식하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음)

- 그들이 나를 욕한다고 생각

- 비건의 존재가 미움

- 비건이 하는 말이 옳은 것을 알지만, 듣기 싫고 기분이 나쁨


사실, 강요를 하는 사람들은 비건이 아니라 육식주의 세상이다.


학교나 회사, 병원, 군대 등 단체급식이 제공되는 경우 비건식으로 제공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신기하게 발견을 한다고 해도 그 비율이 모든 급식에 비해서 얼마나 될까?

심지어 비건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조차 없다. 그냥 주는 대로 먹으라는 식이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김에 쌀밥을 먹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동물을 갈아 넣고, 우려낸 음식이 대부분이다.

식당을 선택할 때는 또 어떤가, 비건 전문식당이 아닌 이상 육식 정상 사회인 세상에서 비건들은 외식을 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1 비건이 뭔지 모르는 경우. 채식이라고 하지만 닭알과 소젖은 왜 채소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2 비건인데 동물을 빼 달라고 하면 유난을 떤다고 하거나 그럼 맛이 없으므로 해주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

3 비건식을 제공해준다고 해서 찾아갔지만 동물조각이 나오거나 교차오염의 위험이 있는 경우. 실수로 그런 경우도 있는가 하면 악의를 품고 일부러 놀려주려고 그렇게 하는 경우도 발생.


식당에서 면박을 받는 것은 지인들에게 당하는 조롱에 비하면 그나마 덜 서러운 축에 속한다.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느니, 단백질 타령에, 채식하면 건강에 해롭다느니, 무슨 종교 믿냐, 사이비 종교 아니냐느니, 이제 그만하고 그냥 좀 먹어라, 왜 이렇게 유난을 떠냐, 언제까지 채식할 거냐, 너 때문에 "고기"를 못 먹는다 등등 아주 말만 들어도 온갖 정이란 정은 다 떨어지고 진절머리가 난다.


비건으로 만들어도 충분히 맛있고, 육식하는 사람들은 비건인지 아닌지 눈치도 못 챌 음식이나 제품들에도 동물들의 죽은 몸은 다양한 형태로 착취당해 곳곳에 들어가 있다. 편의점만 가도 비건이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어렵고, 사람들은 그놈의 "고기"타령만 하고, 비건은 채식 전문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을 해서 먹어야 한다.


게다가 영상물을 좀 보려고 하면 광고에서는 죽은 동물들을 먹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채식을 비하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프로그램들, 너무 당연하게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들로 가득하다.


이게 육식 강요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설마, 육식 정상 사회이기 때문에 이게 "당연한 거"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하진 않겠지.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단 한 사람이 행동하더라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더라도.


강요는 육식하는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들이 인지하고 있든 아니든,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육식을 하고, 육식을 즐기기 때문에 비인간 동물들은 강제로 태어나서, 강제로 끔찍한 환경에서 가둬져서 우리가 상상도 못 할 고통을 받으면서 키워지고, 죽음을 강요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고, 울부짖고 몸부림을 친다. 이유는 단지 인간이 "먹고 싶어"하기 때문에.

동물들은 오늘도 강제 임신을 당하고, 태어나며, 고통에 시달리고, 착취를 당하고, 죽음을 당한다.


우리는 동물을 잡아먹지 않아도 충분히, 아니 훨씬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다. 게다가 이 끔찍한 현대사회의 공장식 축산은 몇십억 마리의 동물들을 착취하고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병들게 해서 죽이고, 지구를 오염시켜서 모두를 서서히 죽이고 있다.



동물을 계속해서 많이 먹으면 높은 확률로 암, 당뇨, 심장병 등 각종 성인병에 걸린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걸릴 확률이 계속해서 높아진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비거니즘을 알고 실천했으면 좋겠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들도 진실을 알게 된다면 당연히 선택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어도 비거니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고 변하고 싶어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어떻게 해서든 도와줄 것이다. 별 생산적인 이유도 목적도 없이 삐딱하게 남들한테 시비를 걸기 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할 시간과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백만마리의 육지동물들이 인간의 욕심때문에 죽는다. 매일매일. 하루에 백만마리의 동물들이 죽어나간다.


사람들은 내가 하고 있는 나쁜 행동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비거니즘은 육식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내가 하고 있는 나쁜 행동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것이고, 당연히 그 과정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동물들은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감을 가지고 삐딱하게 바라본다. 막연하게 그냥 싫어한다. 시비를 거는 경우도 많고, 사실을 이야기하기만 해도 자기 혼자 기분이 나빠서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육식을 하는 사람에게 비거니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의 선택이라고? 개인의 선택이 맞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비건이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비건이 되는 것은,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고 윤리적인 소비를 하기 위한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나와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나의 진짜 선택지가 어디까지 인가는 제대로 알고 난 뒤에 선택을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내가 모르는 어떤 누군가가 보라고 들이밀고 있는 한정된 선택지만을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 내가 나의 자유의지로 나의 선택을 하는 데에 나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가?


비건이 아닌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이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주어진 보기들 중에서만 고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육식을 한다면


Q 오늘 죽여서 먹을 동물을 고르시오.

1) 닭

2) 돼지

3) 소


Q 내가 먹을 동물을 죽일 방법 중 하나를 고르시오.

1) 총으로 쏴 죽이기

2) 칼로 찔러 죽이기

3) 가스로 질식시켜 죽이기


어쨌든 동물은 죽는다. 나의 선택 때문에. 인간의 식단에 "필요"하지 않은 육식을 계속해서 선택하는 나 때문에 죄 없는 동물은 강제로 태어나서 고통받다가 죽는다.


육식을 멈춘다는 것은 그 보기에 하나를 더하는 것이다.


Q 오늘 죽여서 먹을 동물을 고르시오.

1) 닭

2) 돼지

3) 소

4) 아무도 안 죽이고 식물을 먹는다


Q 내가 먹을 동물을 죽일 방법 중 하나를 고르시오.

1) 총으로 쏴 죽이기

2) 칼로 찔러 죽이기

3) 가스로 질식시켜 죽이기

4) 죽이지 않는다



이건 겨우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훨씬 더 많은 그동안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있는지도 몰랐던 보기를 포함한 상태에서 "진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싫어하고, 불편해하고, 두려워한다. 변화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몰랐을 때는 싫고 무서웠지만 알고 보니 별것 아니던 게 얼마나 많은가? 모든 것은 변화한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도 계속해서 재생산이 되고 죽은 세포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십 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믿던 때가 있었고, 노예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더 빨리 적응하고 살아남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 열린 마음과 생각으로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도 있다. 우리 각각은 모두 다르다. 다른 것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이나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 또한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심지어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모습 또한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서 싫어하고 욕하는 대신 저 사람이 왜 그럴까에 대해서 알아보고 생각해보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행해질 때 우리의 사물을 보는 눈은 좀 더 넓어지고, 세상은 조금 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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