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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Jun 19. 2021

구급차를 타고 아이를 낳으러 갔다

36주3일, 출산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소박한 바람이 있었다. 가급적 밤이나 새벽은 피해서 분만하고 싶다! 자연분만한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독 밤에서 새벽 사이에 출산한 경우가 많았다. 유독 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날밤을 새며 진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바람은 바람일 뿐. 막달 검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날 자정, 나는 점점 심해지는 진통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조산기 때문에 배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 배뭉침은 셀 수 없이 경험했지만, 진통은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뱃속에 있는 수백 개의 고통 스위치를 일제히 타다닥 켜는 느낌이랄까. 결국 나는 창백한 얼굴로 당시 머무르던 친정집 거실로 나갔다.


"엄마.... 아무래도 진통인 것 같아..."


산후도우미 자격증이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많았던 친정어머니는 바로 진통 간격부터 체크했다. 진통 간격은 약 30분 만에 급속도로 짧아져 4~6분 정도였다. 게다가 고위험 산모인 나는 원래 다니던 여성병원이 아닌 대학병원 응급실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이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아기 낳으려면 힘을 써야 한다"며 아버지에게 고기를 구우라고 시켰다. 아버지는 처음 겪는 상황에 허둥지둥하면서도 소고기를 몇 점 구워, 끙끙 앓는 나의 입에 넣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판단은 탁월했다. 실제로 병원에 들어간 이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허약체질이었어도 구급차를 타본 적은 없었는데, 출산 때문에 타게 될 줄이야. 우당탕탕의 연속이었던 임신에 이어 출산도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다. 몇 번의 컨택 끝에 인큐베이터 자리가 있는 대학병원을 찾았다. 구급차는 신속하게 밤거리를 달려, 평소라면 30분 정도가 걸리는 병원에 15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


아무래도 대학병원이니 북적북적거릴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분만대기실은 고요했다. 그날따라 자연분만을 하는 산모가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직근무를 하던 의료진은 아쉬웠겠지만(?)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이때까지는 사진도 찍을 여유가 있었다. 앞으로 닥칠 일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자궁수축(진통의 강도)를 보여주는 모니터기. 진통이 올 때마다 파란 선이 솟아오르는데, 강도가 셀수록 산도 더 높아진다.


새벽 2시에 의사가 내진을 했는데 이미 자궁경부의  40%가 열려있었고, 30분 뒤에 진행한 내진에서는 60%가 열려있었다. 진행속도가 너무 빨라 무통주사를 맞을 수 없었.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호기로웠다. 아기도 작은 편이고(머리 둘레는 이미 만삭아와 비슷했다는 걸 낳고나서야 알았다) 속골반 넓이도 괜찮고, 진행 속도도 빠른 편이라고 하니까...


그러나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정작 아이는 오늘 나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모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계속 배 위쪽에서 놀고 있었다. 새벽 4시, 결국 의사가 힘으로 양수를 터뜨렸다. 양수가 터지니 진통의 강도는 순식간에 두 세 배로 뛰었다. 게다가 통이 배가 아닌 허리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허리 진통'이었다. 코끼리 발로 허리를 잘근잘근 밟히는 것 같았다.


"아악!! 살려주세요!"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렸다. 내가 지르는 것이었다. 생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었던 소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간호사는 "소리 지르면 안 돼요! 힘 빠져요!"라고 단호하게 제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나는 다리를 W자로 벌리고 상체를 들어 힘을 주는 기본 동작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산기로 몇 달 동안 누워만 있으면서 온몸의 근육이 약해져 있던 탓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죽을 것 같은) 진통이 올 때에 맞춰 (죽을) 힘을 줘야 하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이래서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고 하는구나. 혼미한 와중에 의사의 말이 들렸다. "산모님! 힘 못 주시면 제왕절개 해야 해요!" 정말 이대로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고통은 있는 대로 다 겪고 제왕절개까지 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먼지처럼 부스러진 정신력을 그러모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 싸움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도 함께 하고 있다.



아이의 머리가 산도 바로 밑까지 내려온 것이 느껴졌다. 주변이 분주해지더니 분만을 담당하는 의사가 나타났다. 이쯤 되면, 정말로 분만이 임박한 것이다. 의사가 어머니와 남편에게 분만 중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위험에 대해 고지하는 동안, 나는 분만실로 옮겨졌다. 내 희망은 가족 같은 분만실에서 남편과 함께 호흡하며 아이를 맞이하는 것이었건만, 현실에서는 홀로 대학병원의 차가운 분만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의사의 사인에 맞춰 최후의 힘주기에 돌입했다. 한 번, 두 번. 드디어 "힘 빼세요~"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나의 몸속을 스윽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6시 4분, 여아입니다.






아기는 캥거루 케어도 하지 못하고 바로 검사를 위해 옮겨졌다. 36주3일, 2.45kg로 아슬하게 미숙아의 기준(37주, 2.5kg)에 걸쳐있었기 때문이다. 분만하면 바로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가 산도를 빠져나오면서 질 내부가 7cm가량 찢어지는 바람에 후처치에 40분 정도가 걸렸다(의외로 이게 꽤 아팠다. 그리고 이 상처는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진통이 떠나가니, 마치 극기훈련 뒤에 집에 온 사람처럼 기분이 좋았다. 전날 밤 10시부터 진통이 시작되어 새벽 6시에 분만했으니, 8시간 만이었다. 초산모가 평균 9-10시간 걸리는 걸 생각하면 정말 빨랐다. 나를 늘 걱정시켰던 연약한 자궁경부가 출산 때만큼은 시간 단축에 도움을 준 셈이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대기실에 난 커다란 창으들어와 침대보 끝에서 부서지던 아침 햇살, 친정어머니와 남편의 환한 미소, 휴대폰으로 처음 만난 아이의 얼굴. 아이는 체온을 유지해주는 모자를 쓴 채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의 초대에 응답해준 최초의 아이를, 그렇게 만났다.


이렇게 만나려고, 너나 나나 고생이 많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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