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보고 가슴이 덜컹했다. 아이의 어린이집.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에는 웬만해서는 전화가 오지 않는데, 아이가 다쳤나? 열이 나나?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내가 단 1g도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흘러갔다. 며칠 전 어린이집 운영이사회에서 폐원하기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고, 빨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근처의 어린이집에 현 재원생들을 부탁했다는 이야기까지... 놀란 가슴을 앉히기도 전에 내가 말을 꺼내야 하는 타이밍이 왔다.
"아... 너무 아쉬워서 어떡해요!"
비교적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에도 일순간 떨림이 일었다. "어머님... 저희도 너무 죄송스럽고... ㅇㅇ이 믿고 보내주셨는데 이렇게 되어서 너무 죄송해요..." 통화를 마무리한 다음에도, 놀람과 헛헛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와서 코로나19 때문에 1년간 가정보육을 했다. 활발한 아이는 집에만 있는 것이 심심했고, 나 또한 아이의 에너지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가정보육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어린이집 신학기 입소 신청을 했고, 그때 나를 건져 올려준 곳이 지금의 어린이집이었다. 나만큼이나 집콕 생활이 힘겨웠던 아이는 적응 기간에 어린이집에서 안 나올 정도로 좋아했다.
엉덩이에서 신남이 느껴진다
그러나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코로나 시국으로 아이와 함께 입학할 예정이었던 아이들이 입소 취소를 하는 바람에, 만 1세 반에는 우리 아이 한 명뿐이었다. 담임선생님과 혼자 노는 것이 심심했던 아이는 만 2세 반에 가서 천연덕스럽게 앉아있곤 했었다. 결국 원과 상의 끝에, 5월부터 상급반(만 2세 반)으로 옮겼다. 마침 아이가 2월생이기에 가능했다.
아이는 만 2세 반 안에서도 말은 제법 하는 편이었지만, 천방지축 세 살 아니랄까 봐 놀이 기술이 미숙했다. 같이 놀자고 다가오는 언니를 밀기도 하고, 오빠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와르르 무너뜨려 오빠들이 속상해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전해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미안함으로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제일 동생이라고, 같은 반 언니 오빠들이 많이 챙겨주고 사랑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밤, 아이는 밤에 침대에 누워 "어린이집 좋아! 선생님 좋아! 친구들 좋아!" 뜬금없는 사랑고백을 했다. 첫 사회생활, 첫 선생님, 첫 친구들은 꽤나 아이에게 다정했고, 아이도 그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미처 해줄 수 없는 다양한 경험들이 어린이집에서는 가능했다. 나도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새로운 일들을 많이 시도했다. 1년 전 하루 종일 집에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놀던 모녀는, 같은 시간 동안 다른 곳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풍성해졌다.
우리에게 그런 존재였던 어린이집이 몇 달 뒤 문을 닫는다. 점점 줄어드는 아이들과 코로나19로 인한 여파가 곳곳을 덮치고 있는 줄은 알았다. 우리 아파트에도 '한때 이곳에 어린이집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긴, 알록달록한 시트지가 붙여진 1층 세대가 몇 군데나 있다. 한때는 매우 큰 유치원이었던 4층 건물에는, 이제 요양보호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폐원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 주에는 내년부터 다니게 될 새 어린이집에 입학 원서를 쓰러 간다. 그때 아이를 데려가서 새 기관을 소개해주기로 했다. 아이는 첫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쩌면 '첫 이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직접 다니지도 않은 내가 왜 이리 마음이 찌르르한지 모르겠다. 친정도 시댁도 먼 타지에 와서, 나 또한 의지를 많이 했나 보다.
어린이집은 폐원을 결정한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밝고 활기차다. 아이들의 조잘대는 말소리, 점심밥 뜸 들이는 구수한 냄새, 반갑게 맞아주시는 선생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아이들이 함께 놀고 배우며 자랐던 공간은, 그렇게 티 나지 않게 조금씩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