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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Nov 22. 2022

오른쪽 눈에 바다가 생겼다

유리체 출혈 후 100일의 기록

8월 15일, 여느 때처럼 자기 싫다며 칭얼거리는 아이를 눕히고 주변 이불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오른쪽 눈에 번쩍 하는 섬광이 일며 통증이 몰려왔다. 아이가 몸을 돌리며 다리를 힘차게 뻗었는데 그 발뒤꿈치가 나의 오른눈을 정확하게 가격한 것이다.


아픔은 둘째치고 너무 놀라 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르니 아픔도 사라지고, 괜찮아진 것 같아 아이를 재우고 나도 잠이 들었다.


그다음 날, 아이를 등원시키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데 시야 속을 둥둥 떠다니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버그 볼처럼 까맣고 깨알 같은 점들의 무리, 그리고 해초처럼 길게 늘어진 무언가.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7세부터 안경을 껴왔던 고도근시라 비문이 원래 많은 편이었고, 그냥 내 몸의 일부처럼 인식하면서 살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못 보던 친구들이 출몰한 것이다.


비문이 갑자기 많아지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망막박리나 열공이 생겼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대로 두면 실명까지 이른다. 친정아버지도 몇 년 전 갑자기 비문이 많아져서 안과에 갔다가, 망막박리라는 진단을 받고 응급수술을 했던 일이 있었다. 내게는 꽤 실제적인 두려움이었기에, 바로 안과를 검색해서 찾아갔다. 검사 결과 다행히 큰 이상은 안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저녁, 아이의 밥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오른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뿌연 안개인 듯 흙탕물인 듯 비문의 무리가 중심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결국 대학병원 안과 응급실을 찾아야 했다.


안과 응급실을 찾게 될 줄이야...


우여곡절 끝에, 유리체 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안구를 채우고 있는 말랑말랑한 물질 안에 피가 차서 뿌옇게 보이는 거라고 했다. 다행인 점은 안와골절, 망막박리나 열공 등은 관찰되지 않고 단순히 외부 충격에 의한 출혈일 가능성이 높았다. 치료방법은 딱히 없었다. 유리체 안에 고인 피가 자연 흡수되기를 기다리는 것뿐.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생각보다 꽤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초점이 잘 맞지 않기도 했고, 오른눈을 떠다니는 비문 무리에 계속 신경이 가니 계속 두통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보다 마음을 더 힘들게 했던 건, '눈이 영영 이런 상태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었다.


다행히 비문은 서서히, 한 달 사이에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약 100일이 흐른 지금은 시력이 90% 정도 회복되었다. 한동안 '광시증'이라고 해서 캄캄한 곳에서 눈을 감으면 번쩍번쩍 스파크가 일었는데, 그 증상도 지금은 없다(충격을 받은 눈이 예민해져서 그랬던 듯하다).


지금 내 오른눈은 마치 바닷속 같다. 해초 무리, 조개껍데기, 해파리, 작은 물고기들이 부유하며 헤엄친다. 맑은 하늘이나 종이의 흰 배경을 바라보면 이 친구들이 유독 잘 보인다. 시선이 이동할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제법 생물체 같기도 하다.


약간 이런 느낌이다. 좀 흐릿하긴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많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렇지만 새롭게 합류한 이 친구들과 잘 지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살아간다는 건 내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함께 가는 여정임을 이렇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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