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요즘 최대관심사는 그림 그리기이다. 선들을 쓱쓱 그려놓고 뿌듯해한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나름의 설명도 가능하다.
얼마 전에는 벽과 책장, 변기에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는 바람에 약간 자제를 시켜야 했다. 예전에는 스케치북에만 그림을 그리더니, 이젠 좀 더 자유롭게 그리고 싶나 보다.
아이의 예술혼이 지나간 자리
아이의 예술혼을 적극 장려하고 싶었지만, 현실적 제약(전셋집)도 있었고 어디든 쓱쓱 그리면 난감한 상황이 예상되었기에... 우선 아이에게 지우개를 쥐어주고 지울 수 있는 낙서는 지우게 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도 되는 곳과 그리면 안 되는 곳을 지정해 주었다.
"스케치북, 화이트보드, 자석칠판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저기 있는 종이책장에도 그릴 수 있고."
우리 집 거실 한편에는 골판지로 만든 종이책장이 있다. 그 책장에는 마음껏 그려도 된다고 하니, 신나서 연필을 들고 달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뭔가를 그리더니, 나를 부른다.
"엄마! 여기 와봐요~"
동그란 얼굴에 까만 머리에 눈, 코, 입.
"이게 누구야?"
"엄마야!"
"이건 엄마야."
"여기는 엄마 회사야. 나는 어린이집에 있어."
아이가 신이 나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찾아들었다. 향수에 상향, 중향, 하향이 있는 것처럼, 여러 감정과 생각이 밀려왔다.
첫 번째 감정은 '행복함'이었다. 이 시간이 앞으로 나에게 평생 기억될 순간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아이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
그다음엔, '이 순간이 엄청 빨리 나에게서 멀어져 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서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그리며 아기새처럼 조잘거리는 이 아이가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내 옆에 머무르는구나.
그 감정과 생각의 끝에서 나는 '소중함'이라는 의미에 머물렀다. 우리 집에 온 이 꼬마손님이 머무르는 이 시간은 유한하다. 더 이상 꼬마가 아니게 되어 자신의 집을 짓고 떠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이 기억을 두고두고 꺼내보겠구나.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김창옥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부모가 그리했듯이 아이도 언젠가는 자신만의 태양계를 만들고, 부모와 아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고. 그래서 어떤 별이 인간의 한계로 갈 수 없을 만큼 먼 것처럼 그렇게 멀어질 수도 있다고.
그 간극을 돌파하는 해법은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웜홀'을 만드는 것인데, 이를 가족과의 관계에 대입하자면 '추억'이라고 설명했다. 추억이 있으면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멀더라도 단숨에 서로를 연결 지을 수 있다.
사실 아직까지도 나는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다. 육아로 인해 스스로를 잃고 싶지는 않다 외치다가도, "어린이집 안 가고 엄마랑 있을래"라며 품속을 파고드는 아이를 보며 미안함을 느낀다.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면서, 정작 오늘의 아이를 마음껏 사랑해주지도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
나와 아이는 탄생의 시점부터 조금씩 멀어진다. 별과 별 사이가 점점 멀어지듯이. 그러나 인간과 별이 다른 점은, 인간은 '기억'을 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을 눈과 가슴에 새겨본다. 이 웜홀을 타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아이에게 가 닿을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