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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Apr 07. 2023

'외동 전성시대'에 둘째 고민이라니

통계청의 한 조사에 따르면, 2022년의 전체 출생아 중 첫째 아이의 비중 62.7%를 돌파했다. 1981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 비율이라고 한다. 반면 둘째 아이는 전년 대비 16.7% 감소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80년대 후반에 외동으로 태어난 남편은, '외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심을 받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 반에 외동이 한  명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가히 '외동 전성시대'이다.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이는 하나로 끝!"을 외치는 지인들이 꽤 있다.


긴 건, 아이가 네 돌을 맞은 지금도 우리 부부는 둘째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둘째 고민은 낳거나 못 낳게 되어서야 끝난다"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왜 둘째 출산을 망설이고,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한 아주 사적이고, 시시콜콜한 답변이다.




망설이는 이유



1.

신혼 시절, 자녀계획을 짤 때 나는 농담처럼 "첫째 낳아보고 결정하겠다"라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임신은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 중에서 가장 '나의 노력 밖에 있는 영역'이었다.


우선 나는 배란에 어려움이 있어서, 아이를 가지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임신 준비 기간 동안, 나는 마치 기약 없는 초대장을 쓰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오는 과정도 녹록지 않았지만, 찾아온 아이를 280여 일 동안 품어 무사히 내보내는 것도 어려웠다.



(브런치에도 기록을 남겼었지만) '임신'을 돌아봤을 때 입덧과 조산기로 내내 고생한 기억이 크다. 한 달 일찍 나오면서 머리 둘레는 만삭아였던 아이를 무통 주사도 못 맞고 자연분만하느라 후처치에 1시간이 걸렸다. 출산 직후에는 널뛰는 호르몬과 훗배앓이, 유륜염으로 우울했다.

 

'누군가는 무던하게 해내는 과정일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유난일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러한 생각이 의미 없다는 걸 안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니까. 다만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신감이 매우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 과정이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둘째는 첫째보다 조산을 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첫아이는 36주 3일에 나왔지만 폐호흡도 잘하고 비교적 건강하게 나왔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왔더라면 NICU(신생아집중치료실)에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첫째는 작게 태어나 지금도 성장이 더딘 편이다. 이런 일을 겪으니, 둘째에 대한 이 마음이 혹여 무책임한 낙관은 아닐까 자꾸 의심하게 된다.



2.

아이를 키우며 마주치는 돌봄 문제도 망설임의 한 축을 차지한다. 내가 지금 사는 곳은 친정과 시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다. 이 말인즉슨, 우리 부부가 아이의 돌봄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곳은 어린이집뿐이다(그런 점에서 어린이집의 선생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이 돌봄 서비스도 알아봤지만, 보통 아이가 아플 때 급하게 신청하게 되다 보니 매칭이 안 될 수도 있는 점이 힘들었다. 끝내 매칭이 안 되면 어차피 남편이나 내가 시간을 빼야 한다.


아이가 열이 나거나 많이 아파서 장기 돌봄이 필요한 상황일 때는 차로 4시간 거리에 떨어진 친정에 1~2주 동안 맡겨야 했다. 아이가 양육자와 잘 떨어져서 지내는 편이라 다행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나' 마음이 힘들었던  많았다.


양가 부모님들도 생업이 있고, 나 또한 '우리 아이는 최대한 우리가 커버하자'는 생각이 강하다. 최근에도 나는 아이의 열감기로 출근을 이틀 동안 하지 못했다. 아이 하나에 어른 둘의 스케줄 사정없이 흔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 1명이 더 늘어나면 우리의 역량에서 감당이 가능할지 확신이 없는 것이다.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이렇게 쓰니 마음이 괜히 약간 시리다. 앞에 그렇게 구구절절하게 힘든 이유를 늘어놓고선 '그래서 우리는 아이 하나끝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

비록 내가 낳았지만, 별개의 자아를 갖고 움직이는 아이가 경이롭다. 하루하루가 다르고, 하물며 작년의 아이와 올해의 아이는 마치 다른 존재인 듯하다. 큰 이벤트 없이 흘러가는 나의 삶과 비교하면, 아이의 시간은 확실히 역동적이다.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아동발달을 배우고, 숱하게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경험은 더 압축적이고 실제적이었다. 그래서 힘들었지만, 그만큼 더 많이 배웠다. 머릿속 지식으로 존재하던 내용이 아이를 만나면서 더 알록달록 선명해졌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내면에 있던 구질구질한 모습을 직면했다. 모든 걸 투명하게 발산하는 아이 앞에서 내가 30여 년간 쌓아온 사회적 가면은 힘을 잃었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운 경험이 역설적으로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확실히 아이를 낳기 전과 지금의 나는 다르다. 첫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많은 것을 느꼈고, 성장했다.


아이 둘 이상을 양육하는 지인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은, "아이들은 정말 다 다르다."라는 것이었다. 첫째에게 통했던 육아가 다른 아이에게는 통하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이 아이를 키우며 내가 확신하는 육아 철학이 실은 편향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가 생긴다고 해서 내가 모든 육아 철학을 통달할 수는 없다(당연하다). 그러나 수많은 양육자를 만나면서 부모교육을 공부하는 내가 겸손해지고 더 배우는 계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2.

나의 유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남동생이 있어서 좋았을 때도 있었고 싫었던 때도 있었다. 반면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외동으로 자란 남편은 그런 점을 부러워한다.


'외동은 외로우니 둘째를 낳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진 않는다. 형제자매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가장 치열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양육자가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만약 둘째가 생긴다면, 그건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큰 변화일 테다. 아이가 동생의 존재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예측할 수는 없다. 지금 아이가 어린이집의 동생반 아이들을 엄청 예뻐한다고 해서, 자기 동생도 그렇게 좋아하리란 보장이 없다.


아이에게 열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가 있다는 점은 참 묘한 느낌이다. 그 영향을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특히 그리하다. 확실한 건, 어느 쪽을 택하든 책임은 우리 부부의 몫이다. 둘째가 아이의 삶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아이가 동생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며 긍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탄생을 선택할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저출산 문제로 시끌시끌한 요즘이다. 우리 부부처럼 '아이가 한 명 있는 가정'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는 듯하다.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 부부의 고민이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가벼워질는지. 어떻게 고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생명을 세상으로 초대하는 일인데 말이다.


아무튼 올해와 내년이 둘째 고민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구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그 시간이 흐른 뒤 우리 가족이 어떤 모습일지는, 나 또한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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