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월의 마지막 월요일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지 2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2주 전부터 계속 기침을 하긴 했었지만, 그냥 '콜록콜록' 하는 정도였다. 열도 없었고, 아이의 컨디션도 좋았다. 그래서 동네 의원을 오가며 진료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의 기침 소리가 바뀌었다. '컥컥'하면서 숨을 내뱉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더 큰 어린이병원을 찾았는데, 폐에 염증이 발견되었다. 이미 외래치료로 큰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입원을 권유한다는 소견을 들었다. 이미 2주가량 기침으로 고생한 아이를 지켜본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장애인복지관의 언어치료사로 출근을 시작한 지 겨우 한 달 된 시점이었다. 내가 만나는 대상자들은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1주의 치료 공백조차 민감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아이의 입원으로 당장 한 주간의 치료수업을 모두 빼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남편은 직업 특성상 연차를 자유로이 쓸 수 없고, 시어머니는 일을 하신다. 친정어머니 또한 모종의 사정으로 당장 도와주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주말 밤에 '아이의 입원으로 다음 주 수업은 쉰다'라고 양해를 구하는 문자를 보냈다. 부모님들께서 보내주신 응원의 답장을 받고서야, 나는 한없이 무거워진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생일이라고 축하 연락을 해온 지인들에게, 나는 아이의 입원 소식을 전했다. '잘 지내지~'라고 하면 약간 거짓말하는 기분이라 그냥 솔직하게 근황을 전했다. 그래도 덕분에 응원의 마음만큼은 넉넉히 받았다.
정작 아이는 엄마의 생일을 맞아 작정한 듯이(말도 안 되지만 진짜 이런 느낌이다)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는 "심심해~"라고 말하며 링거줄을 달고 거침없이 돌아다녔고, 그때마다 나는 기겁을 하며 폴대를 끌고 뒤를 쫓았다. "약 먹자~"라고 말하면 "약 안 먹을 거야!", "밥 먹자~"라고 하면 "밥 안 먹을 거야!"라고 하며 저항하고 떼를 썼다.
참을 인을 새기며 '아이가 잠들 때까지 참자... 육퇴 하고 조금 남은 생일을 좀 누려보자' 생각했더니만, 그날 아이는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밤 12시가 다 되어 잠들었다.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하고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 생각했다. 2022년 생일은 정말 잊지 못할 날이 되겠구나!
퇴원하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아이도 참 힘들었겠다 이해가 가지만, 그 당시의 나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싶을 만큼 암담했다. 어린이병원이라 입원병동에는 돌전 아가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큰 소리를 내어 울거나 시끄럽게 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그러다 보니 나도 욱하는 마음에 성질을 냈다.
그 와중에 우리보다 먼저 입원한 것 같은 옆 침대 엄마는 아이가 짜증을 내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받아주었다. 아이도 어쩌다 몇 번 짜증을 낼 뿐 약도 잘 먹고 호흡기 치료도 잘 받고 아주 순하게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만 화내는 엄마가 된 것 같아 쭈그러들었다.
4일 동안 전쟁과도 같았던 시간이 지나자, 나도 아이도 점차 병원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병원 생활의 장점도 있었다. 요리와 정리에 별 소질이 없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이가 차려주는' 세 끼 밥을 먹고 심지어 설거지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아이 또한 울고 떼써도 안 되는 건 안된다는 걸 알게 된 후, 조금씩 협조하기 시작했다.
생일날 아침, 병원에서 어떻게 알고 미역국을 끓여주셨다(사실 아님 주의)
우리 아이가 퇴원하기 전날 들어온 아이의 어머니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화 한 번을 안 내세요? 대단하세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먼저 퇴원한 옆 침대의 아이 어머니를 보며 했던 내 생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어머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전쟁 같은 과정을 거쳐 평화(?)를 얻은 것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이번 일로 오랜 시간 동안 병원에 있는 아이와 부모님들의 고충에 대해서도 감히 헤아려보게 되었다. 폐렴은 합병증이 생기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병이다(우리 아이도 6일 만에 퇴원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훨씬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한다. 어쩌면 병실에서 몇 번이고 생일을 맞은 아이나 부모님도 있을 것이다.
불행의 경중을 따져 '그나마 이 정도라 다행이다' 하는 우월함에서 비롯된 감사함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에 가깝다. 아이를 위해 내 시간을 희생한 것 같은 억울함, 생일을 아이의 병실에서 맞았다고 잠시나마 스스로를 연민하던 내 모습을 되돌아본다.
아주 잠깐, 4인실이 모두 비었던 순간
그리고 6일 동안 애쓴 스스로에게 그냥 잘했다 한 마디만 해주고 싶다. 병원에 있으면서 내가 만난 이들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많을까? 왜 이렇게 아이를 받아주지 못할까? 고민하면서도, 기침하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고 토하면 옷과 시트를 갈아주며 정작 자신들은 쪽잠을 잤다.
조건 없이 사랑하지 못함을 자책하면서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내게도 '보호자로서 충분히 애썼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보호자로서 처음 경험한 '입원 잔혹사'는 끝이 났다. 병원을 나서면서 간절히 바랐다. '다시는 올 일이 없었으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