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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May 06. 2021

그냥, 아이가 좋아서

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上)


나를 소개할 일이 있을 때, "언어재활사로 일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언어재활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 그럼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하면서 넌지시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어재활사(언어치료사)사실 대중적인 직업이 아니다. 언어재활(치료)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대개 아이 엄마들인 경우가 많다. 아이의 언어발달이 느리거나 부정확한 발음, 말더듬 등의 문제가 있어 고민하는 엄마들이 주로 언어재활(언어치료)의 존재를 접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부터 언어병리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학과 아동가족학을 복수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아동 권리 신장을 전문으로 활동하는 비영리민간단체(NGO)에서 1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언어재활사라는 직종에 대해 알게 되었고 퇴사 후 언어치료대학원에 진학했다. 복지관과 발달센터에서 언어재활사로 일하다가, 아이를 낳고 전업맘으로 산지 벌써 3년이 되었다.






한 우물을 진득이 판 스타일은 아니지만, 내 20대는 크게 두 축의 강력한 동기 안에서 통합된다. 첫 번째 동기는 '아이가 좋아서' 한 일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전공을 사회복지로 선택한 것도 아동복지에 관심이 있어서였고, 내가 하던 자원봉사활동 또한 전부 아이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열정은 실로 나의 타고난 내향성을 극복할 만큼 대단했었다. 학교 동기들이 개강 때마다 "너 휴학했어? 왜 안 보여?"라고 메시지를 보낼 만큼 학교에서 두문불출했던 나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아동권리교육 강사'라는 또 하나의 부캐가 있었다.


백여 명의 미취학 아동들 앞에서 요정 날개를 달고 나타나 "여러분 안녕! 어어? 소리가 작은데?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여러분 안녕!" 하고 노련한 멘트를 날렸다. 자신의 눈 앞에 선 낯선 요정이 목소리가 작다고 사라져 버릴까 봐 간절한 눈빛으로 목청껏 "안녀엉!!" 하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아동권리교육에 쓰였던 인형들. 인형이 살아있다고 믿는 아이들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인형들도 함부로 두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자원봉사와 사회복지현장실습을 꾸준하게 했던 NGO에 입사 지원을 했고, 운 좋게 첫 도전에 합격해서 1년 동안 근무를 했다. 일이 정말 재미있었지만, 막상 아이들을 볼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직원으로서의 업무는 프로그램 진행과 행정, 봉사자 관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자원봉사자 캠프에서 교육을 진행했던 풋풋한 시절의 나. 24살의 첫 사회생활은 서툴었지만 배운 점도 많았다.


또 사회복지사는 외근과 야근이 잦은 직업 특성상 에너지와 지구력이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나는 둘 다 약했다.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한 후 전직을 결심했고, 언어치료대학원을 졸업한 후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언어재활사가 되었다.


언어재활사는 근무환경이 정말 다양하다. 병원, 발달센터, 복지관, 어린이집 등등에서 근무할 수 있다. 일반화는 힘들지만 주로 성인 대상자를 많이 보는 현장이 있는 반면, 아동을 많이 만나는 현장도 있다. 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나는 곳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저출산 시대와 맞물려 언어치료도 성인 재활의 비중이 더 늘어나고 아동 대상 치료는 점차 축소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좋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다.







또 하나의 동기는 '전문성에 대한 갈망'이었다. 나는 늘 뭔가를 배우고 싶었다. 사실 나의 지적 수준은 매우 평범하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구분이 매우 뚜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강점 중 하나는 '지적 호기심'이다. 나는 잠이 굉장히 많은 편인데(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할 말이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잠을 포기하면서 인터넷과 책을 뒤진다. 스스로를 '내향적 에너자이저'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학교를 다닐 때보다 대학원을 다니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대학원에서는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를 조사하고 관련 논문을 서치하고 연구 주제를 정하는데, 그 과정이 흥미로웠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뭔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고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왔다. 내적 호기심이 충족되면 만족해버리는 성향이기도 하고, 학문은 아이디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배웠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치료실습 전•후에 찍은 사진들. 논문 준비와 실습을 병행하던 '시간을 달리는 대학원생'이었을 때.


아무튼 나는 아이들이 좋았고, 그래서 그들을 더 잘 알고 싶었다. 대학교 때 아동가족학과를 복수전공하면서 보육교사 자격증 준비도 하고(취업 때문에 실습을 하지 못해서 최종적으로 자격증을 취득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도 없는 미혼 여성이 서점의 육아서 매대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학습지 홍보직원에게 붙들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과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 이 두 마음이 20대의 나를 이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를 대하는 것에는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다. 적어도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진정성은 확고했고, 25살에 다시 시작한 공부도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 있었다. 내가 열심히 배워서 얻은 지식으로 아이들을 돕고, 생계도 유지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런 나를 보면서 "나중에 아이 낳으면 잘 키우겠다."라고 덕담을 건네는 이도 있었고, "내 애 낳으면 다 소용없어진다"며 장난스레 으름장을 놓는 이도 있었다. 사실 나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 궁금했다. 전문가가 아닌, 엄마로서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의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될 수는 없음을.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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