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겸비 Jun 14. 2021

오은영 박사님도 까다로운 아이였다

까다로운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얼마 전, KBS <대화의 희열 3>에 오은영 박사가 출연한 편을 시청했다(그녀는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지만, 왠지 '의사'보다 '박사'라는 호칭이 더 찰떡같이 느껴진다. 실제로 의학박사이기도 하고). 늘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솔루션을 제시하는 그녀이기에, 그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특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오은영 박사가 이야기한 본인의 유년시절이었다. 8개월에 태어난 1.9kg의 미숙아, 병원에 인큐베이터가 단 두 대뿐이었고 그나마도 다른 아이가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눈도 뜨고 우렁차게 울기에 집으로 데려왔지만, 거의 매일 밤 9시부터 아침까지 자지 못하고 울었다고 한다.


두 돌이 다 되어서야 돌쟁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을 정도로 체구가 작았고, 소고기도 대학교에 가면서 먹었을 정도로 편식이 심했다고 한다. 온 국민의 '육아 멘토'로 활약하는 지금의 그녀를 보면 쉬이 믿기지 않는 과거이다.


출처: '대화의 희열 3' 공식 영상


오은영 박사의 어린 시절은 '까다로운 아이'에 상당히 부합한다. 토마스와 체스의 기질 연구에 따르면 아이의 기질을 크게 9가지 측면으로 분석하고, 이를 크게 '순한 아이', '까다로운 아이', '느린 아이' 세 가지 기질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까다로운 아이'는 전체의 약 10% 정도이다. 먹고 자는 것이 불규칙하고 수면이나 섭식에 예민함이 있으며, 주변 환경에 민감하고, 대체로 활동성이 높아서 약간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질을 이루는 측면의 조화와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양상을 보일 수 있다.




우리 집에도 '까다로운 아이'가 산다. 9달 만에 2.45kg로 태어나 간신히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은 면한 아기. 새벽 2~3시 넘도록 안 자고 놀다가 겨우 잠들면 이유 모를 울음으로 잠을 깨우던 아기, 조금만 배가 차면 젖병을 혀로 밀어내던 아기,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아기, 활동적이어서 따라가기 벅찼던 아기...



아이는 지금도 밖에 나가면 1살 아래 동생들과 같은 나이로 보일 정도로 체구가 작다. 아침은 전혀 먹지 않아서 '그래 두 끼라도 넉넉하게 먹이자'는 마음가짐으로 상을 차리지만 넉넉은 고사하고 정해진 양만 먹으면 감사하다.


활동량은 많은 반면, 밥은 '다이어트 중인가?' 싶을 정도로 관심과 흥미가 없다. 보통 아이들이 선호한다는 카레나 짜장, 케첩도 싫어하고 양념된 고기(떡갈비나 불고기류)도 먹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찬을 하면 아무리 처음에 맛있게 먹었어도 세 번 이상은 먹지 않는 점이 제일 힘들었다.


내 요리 실력이 문제인가 싶어서 시판 유아식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입조차 안 대는 음식이 많아서 내가 다 먹었다. 내 입에도 맛있는데 왜 안 먹는지 의문을 가지며.... 그나마 '내 요리 실력 때문만은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얻은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일까?



18개월 무렵에는 이 까탈스러움이 극에 달했는데, 한 달 넘게 오로지 흰쌀밥과 담백하게 구운 한우와 과일만 먹었다. 다른 것은 모두 거부했다. 심지어 이전에 잘 먹었던 것까지 퇴짜를 놓았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섬유소 등은 다 충족하니 영양소 구성으로만 보면 나쁘진 않았지만, 정말 이렇게만 먹어도 되는 걸까 싶어서 속이 탔다.


25개월에 어린이집을 보낸 것도 '집에서 다 해줄 수 없는 다양한 음식을 접하고 친구들과 함께 밥 먹는 경험을 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자기보다 잘 먹는 친구들을 보며 자극을 받았는지, 28개월이 된 요즘은 혼자서 숟가락을 들고 제법 야무지게 먹는다. "맛있다!"라는 표현도 한다. 하지만 어린이집에서도 자기가 못 먹는 반찬이 나오면 오로지 밥만 싹 비우고 자리를 뜬다.






사실 우리 아이는 어떤 부분에서는 까다롭고, 어떤 부분에서는 까다롭지 않다. 특유의 기질에서 오는 강점도 많다. 예를 들면, 재우는 것은 어렵지만 일단 자고 싶은 만큼 푹 자고 일어나면 좀처럼 짜증을 내는 법이 없다. 어린이집 적응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등원했을 정도로 수월했고, 2월생이라 상위반을 다니지만 몸집도 제일 쪼끄만한 게 언니 오빠들에게 절대 지지 않는 깡다구를 지녔다.



발표와 무대 두려워하지 않으며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모든 사람에 "안녕하쩨여~"라고 인사를 건네는 '핵인싸'이다. 하기 싫은 건 강렬하게 저항하지만 수긍할 때는 '쿨'하고 뒤끝이 없다. 꽃이나 강아지, 아기를 만나면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귀여워~"라고 말하는 의외의 감성도 소유하고 있다(내 눈엔 그렇게 말하는 아이가 더 귀엽다).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아이가 성격이 참 좋네요.", "순하네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는 아이의 '까다로운 면'을 일러바치고 싶은 유혹이 생기지만, 그냥 웃어넘긴다.


나 또한 언어재활사로 일을 하면서 정말 다양한 기질의 아이들을 많이 보았고, '까다로운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들도 만났다. 그때는 부모님들이 호소하는 내용을 다 신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객관적인 전문가들의 판단이 더 정확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주양육자와 그 외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이 다를 때가 꽤 많다는 것을 간과했었다.


누가 봐도 '와 저 아이는 키우기 힘들겠다' 싶은 아이도 있지만, 기질을 숨기고 소위 '모범생'으로 생활하다가 집에 가서 더 편하게 느끼는 주양육자에게 쏟아놓는 아이도 있다. 아이를 오랜 시간 꾸준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모습들이다. 나도 내 아이의 '까다로운 면'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기질의 위력이 얼마나 센 것인지를 깨달았다. 기질에 관한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의 기질을 떠나 모든 육아는 힘들다. 모든 아이는 '나'와 다른 개별적인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순한 아이라도 내 마음처럼 찰떡같이 움직여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아이를 배려해야 한다.


하지만 '까다로운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육아 중에 부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끼고, 양육 효능감도 더 낮은 편이며, 우울함을 경험할 가능성도 더 높다. 정우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엄마들만 아는 세계>라는 책에서 "아이 키우는 일은 공평한 출발선이 될 수 없다(158쪽)"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그렇다면 '까다로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일일까? 이쯤에서 다시 오은영 박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오은영 박사는 그렇게 약하고 까탈스러웠던 자신이 잘 자란 것은 부모님의 덕이라고 이야기했다.


잔병치레로 동네 소아과를 드나드니 의사가 어머니에게 "잘 안 먹어서 몸이 약한 거예요."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나도 유경험자로서, 그런 말을 들으면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오은영 박사님의 어머니는 "이렇게 소아과를 자주 오는 거 보니 나중에 의사가 되려나 봐요."라고 대답하고, 먹는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기에...


출처: '대화의 희열 3' 공식 영상


그녀의 아버지 또한 아이가 너무 약해 보인다는 사람들의 지적에 "그래도 달리기를 얼마나 잘하는데요."라고 강점을 찾아 칭찬해주었다. 어렸을 때의 오은영 박사는 야무졌지만 반면에 고집도 매우 셌는데, 그때마다 아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히 지적하되 아이의 생각에서 일리가 있는 부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며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비추어봐도 정말 놀라운 양육 철학이다.


출처: '대화의 희열 3' 공식 영상


오은영 박사를 보면 특유의 카리스마와 강단이 느껴진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포용하고 유연하게 대한다. 자신의 기질이 가진 고유의 강점을 살리고, 약점은 보완하여 훌륭한 성격(성품)을 꽃피운 케이스이다. 본인의 노력도 엄청났겠지만, 그녀가 이야기한 것처럼 부모님의 긍정적인 시선과 훌륭한 양육이 좋은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의 기질에 관련된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다. 나쁜 소식은 '아이의 기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고, 좋은 소식은 '세상에 나쁜 기질은 없다'는 것이다. 까다롭고 예민한 아이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산만해 보이는 아이는 특유의 에너지로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육아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아이는 바뀌지 않을지언정 그 기질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다. 나와 달라도, 좀 까다로워도 아이는 분명 저마다의 보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를 공부한다. 내 생각으로 아이를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1년 동안 매일 육아일기를 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