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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Aug 04. 2021

허약체질이 엄마가 되면 생기는 일

에너자이저 아이와 비실거리는 엄마의 조합

올 여름휴가 때 일이었다. 가까운 친척이 선뜻 자신의 별장을 빌려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왔다. 마당에 설치된 작은 풀장에서 아이와 함께 놀고, 먹고, 쉬는 아주 간단한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정체모를 편두통으로 끙끙 앓았다. 에어컨 바람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머리가 울렸다.


에어컨을 끄고, 약을 먹고 쉬자 다음날 두통은 사라졌다. 그제야 내가 '냉방병'을 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나씩 추가되는 것들이 생기는데, 올해는 '냉방병'인가 보다.


매년 여름만 되면 더위와 장염으로 고생하는데 냉방병까지 생기다니, 뭔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랜 경험으로 체득했다.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바로 파업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는 허약체질이다. 혈압도 낮고 맥박도 약하다(남편은 피가 돌고 있긴 한 거냐고 진지하게 걱정한다). 여름엔 더워서 아프고, 겨울엔 추워서 아프며, 봄가을에는 환절기 감기로 고생한다. 격하게 움직이면 바로 몸져눕고, 몸을 보하는 한약을 먹으면 위장염을 앓는다.


한창 쌩쌩할 청춘에 수면장애로 고생했고 지금도 자잘자잘한 고장이 잦다. 분명 나보다 허약한 사람도 많을 테지만, 나보다 건강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이 체질은 친정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엄마도 몸이 약했고 30대부터 지금까지 고혈압, 갑상선 질환, 고지혈증, 당뇨 등 다양한 질병 싸워왔다. 아이들이 너무 예뻐 20살에 선교원 선생님이 되었는데, 아이들 앞에서는 천상 밝은 선생님이었다가 매일 저녁만 되면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진정으로 나의 인생과 묘하게 닮은 히스토리이다. 몸이 상해서 24살에 입사했던 회사를 25살에 그만두고 나와야 했을 때에도, 기립성 저혈압과 갑상선 저하증, 조산기 등으로 버라이어티한 임신 기간을 보낼 때에도, 모유 수유하다가 유륜염으로 고통스러워했을 때에도 친정엄마는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괜찮다.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게 또 있기 때문이다. 친정엄마는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그 약한 몸을 이끌고 못하는 일이 없었다. 누구보다 맡은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나도 정말 좋아하는 일, 꼭 해야 할 일은 해냈다. 사실 남들보다 떨어지는 체력을 보충하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목표하던 대학에 들어가고, 퇴사 후 다른 전공에 도전해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때는 주 6일 150세션 이상의 언어치료 세션을 감당하며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육아 또한 체력이 좀 약해도 정신력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섣불리 생각했다. 실제로 엄마가 된 이후로는 잔병치레가 조금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감기 3번 걸렸다면 지금은 1번 걸리는 정도이다. 결혼 전 나의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많이 건강해졌다고들 한다. 심지어 친정엄마조차도 평소에 수면 컨트롤이 힘든 내가 수유 간격에 맞춰 신기루처럼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엄마라고 해내는 거 보니 정말 신기하다'라고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사실은 체력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그냥 '깡다구'로 덮고 있는 셈이다. 아이를 갖기 위해 인생 통틀어 최상의 몸을 준비했지만, 임신과 출산은 그러한 컨디션을 한방에 리셋시킬 만큼 강력했다. 살도 많이 쪘지만 체형 자체가 변했다. 살면서 쌓아온 나름의 몸 관리 노하우도 이젠 통하지 않는다.


엄마도 이랬던 때가 있었단다


체력이 안 되니 정신력이라도 끌어 써야 하는데, 병으로 아프거나 피곤해서 정신력마저 바닥이 나면 문제가 시작된다. 더군다나 아이는 활동성과 주도성이 강하고 대근육 발달도 빠르다(그나마 날 안 닮아 잔병치레가 없는 건 한없이 감사하다). 요구사항도 갈수록 디테일해진다. 하루종일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 달라는 것도 많은데,  텐션을 따라가질 못한다.


에너지를 분출해야 하는 아이와 금세 방전되어 버리는 엄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조합인가. 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 TV장을 기어올라가는 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면, 아이에게 미안하고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뭐라도 시작해야겠다, 큰맘 먹고 필라테스 개인 수업을 신청했다. 수업 첫날 필라테스 선생님이 체형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단번에 짚어냈다. 라운드 숄더, 틀어진 골반, 뒤로 빠진 엉덩이...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뒤의 말이었다. "회원님의 경우에는 체력이 좋지 않으셔서 에너지를 더 아끼기 위해 온몸에 긴장을 빼고 있어요. 몸이 에너지를 아끼는 방향으로 변해서 살도 빠지지 않고 자세도 무너지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하는 2년 동안, 아프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며 '절전 모드'로 움직였다.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근본적으로 '충전'이 되지 않는 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를 더 잘 돌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내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온전히 돌볼 시간.


다행히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비로소 에너지를 충전할 기회가 생겼다. 내향성이 강한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나에게 맞는 운동도 하고, 책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썼다. 가끔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삶에 충전 기류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충전 기류가 끊겼다. 코로나 4차 유행으로 가정보육을 하게 되면서, 운동도 개인적으로 준비하던 일도 잠깐 멈추었다. 여름휴가를 보낸 후 나의 소중한 육아 동지인 남편도 일터로 복귀했다.


"엄마! 일어나요~ 같이 놀아요~" 활기찬 아이의 목소리에 눈을 뜨면서, '오늘도 무사히'를 마음 모아 기도하게 된다. 체력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체력은 약해도 최선은 다하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나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나저나 이번에는 나의 에너지를 얼마나 당겨 쓸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너무 길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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