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도시, 스플리트
그림의 떡은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다. 끝이 정해져 있는 여행은 마치 그림의 떡과 비슷하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시간과 돈에 쫓겨 결국 다 하지 못하고 후회를 한다. 자다르에서 나는 정말 캠핑을 하고 싶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맥주도 마시며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그림이 떡이었던 아쉬운 캠핑을 포기하고 다음 행선지, 크르카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크르카 국립공원은 자다르와 스플리트 사이에 있는 스크라딘이라는작은 마을에 위치해있다. 플리트비체에 비하면 정말 작은 국립공원이지만, 그곳엔 플리트비체와는 또 다른 느낌의 나무와 폭포가 있다. 자다르를 떠나 정오쯤에 스크라딘에도착했다. 스크라딘에서 공원으로 들어가려면 20분짜리 배를 타야 하는데 배는 30분마다 운행했다. 정오에 도착해서 배를 12:30에 타고 한 시간 반 안에 공원을 둘러보고 다시 배를 타고 나와 3시쯤에 버스를 타서 스플리트로 향하는 게 내 목적이었다. 시간이 빠듯해 어쩌면 불가능한 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입장권을 구입했고, 배를 타고 크르카로 향했다.
기분 좋게 비가 오던 크르카에 입장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마어마했다. 가장 먼저 눈앞에 나타난 폭포는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맥주를 한 손에 들고 빠른 걸음으로 총총 공원을 돌면서 크르카를 즐겼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 반이었기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다 둘러봤다. 그리고는 다시 배를 타고 스크라딘으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보니 2:58이다. 스플리트로 향하는 버스는 3시 출발이었기에 나는 죽을힘을 다해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마치 각본이 짜인 듯이 눈앞에 정류장이 보이자마자 저 멀리서 커다란 버스가 오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운 좋게 계획대로 스플리트행 버스에 올라탔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로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개인 황궁을 짓고 은퇴 후 생활을 한 도시로 유명하다. 황제가 사랑한 도시인만큼 여름이면 인기 있는 휴양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기도 한다. 스플리트의 항구에서는 또 다른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휴양지인 흐바르 섬으로 가는 페리도 운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플리트 해안가의 중심가인 리바 거리에는 카페,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들이 줄 서있다.
내가 잡은 숙소는 리바 거리 끝에 위치해있었다. 주소를 헷갈려서 숙소를 찾는데 애를 좀 먹었지만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내가 저녁을 먹은 레스토랑에는 한국어 메뉴판이 준비돼있었다. 서버는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나는 캐나다라고 말하고 영어 메뉴판을 받았다. 기분이 묘했다. 난 분명 한국사람인데 누군가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볼 때는 한국과 캐나다 이 두 개의 답을 두고서는 갈등을 한다. 그리고 어쩔 때는 한국이라 하고 어쩔 때는 캐나다라고 한다.
리바 거리를 지나 한 골목으로 들어가니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가 보였다. 통로 속에는 기념품 가게들이 줄을 서 있었고 통로 끝, 밖으로 나오자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있었다. 황제가 은퇴 후 지냈던 궁전이라기에 상당히 기대를 많이 하고 갔지만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다. 그래도 3세기 말에 지어진 건축물이 아직까지도 거의 멀쩡 하게 남아있는 게 신기했다. 관광지답게 호위병 옷을 입고 사진을 찍어 주고 돈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에게 스플리트가 특별했던 이유가 하나가 더 있었다. 전날 만났던 젤레나가 스플리트에 살았다. 나는 전날 젤레나와 스플리트에서 보자는 약속을 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둘러본 후 젤레나가 일한다는 바로 놀러 갔다. 스플리트 해안 가를 벗어나 도시 외곽으로 20분쯤 걷다 보니 젤레나가 일하는 바가 보였다. 파리가 날리던 바에 들어가니 젤레나가 나를 반갑게 반겨줬다. 내가 사랑하는 오 주스코 맥주를 한 병 시키고 마치 자다르에서처럼 젤레나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가고 싶었던 나는 아쉽지만 젤레나와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20분을 걸어서 숙소로 돌아가서 다음날 계획을 위해 일찍 잠들었다.
흐바르 섬은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스플리트에 숙소를 잡는 것과 흐바르 섬에 숙소를 잡는 것을 고민했을 정도로 나에게는 스플리트와 흐바르 섬은 하나의 패키지 같았다. 하지만 내가 잠에서 깼던 시간은 오전 9시쯤으로 항구에 가보니 흐바르 섬으로 가는 다음 페리가 오후 3시라 한다. 아침에 흐바르 섬에 들어가서 3시쯤에 나오는 게 내 계획이었는데, 내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그래서 결국 다음 도시로 가는 버스를 예약을 하고 리바 거리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들고 스플리트를 프레임에 담았다. 돌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타이머를 맞춘 후, 달려가 포즈를 취하고 웃는다. 흐바르 섬에 못 들어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도 카메라 타이머를 맞춰둔 그 10초는 누구보다 해맑게 웃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