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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Feb 03. 2024

나도 업세이나 써볼까?

모든 것의 시작점

오랫동안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작년 가을에 나와 남자친구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 “푸른빛 하트”를 부크크에서 소장용으로 출판한 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새로 쓴 거라곤 고작 3~4편 밖에 없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내 브런치 계정도 서랍이 텅텅 빈 채로 싸늘히 버려져 있었다. 그나마 네이버 블로그는 일상적인 기록과 사진들을 올리기에 적합한 플랫폼이라서 주간일기라도 꼬박꼬박 올렸다지만, 브런치는 왠지 각을 맞춰서 한 편의 짜임새 있는 긴 글을 올려야 하는 곳처럼 느껴졌으니까. 한때 하루에 두 편씩이나 업데이트를 달리며 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쓸 게 없다.


어느 새부턴가 머릿속에 떠올라서 사라지지 않는 네 글자, “쓸 게 없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최초로 맞이한 글감 고갈 현상에 나는 상당한 당혹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에이, 내가 설마 그럴 리가 없지. 항상 쓸 말이 차고 넘쳤었는데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까?’라고 애써 넘기려 했으나 그게 맘처럼 되질 않았다. 결국 나는 글감이 다 떨어졌다는 사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미어캣의 브런치 서랍과 블로그의 에세이 카테고리는 초유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아도 돼”라는 남자친구의 말에 잠시 동의해보았으나, 글쓰기에 대한 목마름은 항상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오늘만 해도 구독하고 있는 관심 작가들의 브런치를 염탐하며 그들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일일이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누군가의 직장생활 에세이에 하트를 찍어놓고 브라우저의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을 때,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나도 업세이나 써봐?


업세이. 업(業)+에세이(essay), 다시 말해 모든 종류의 생업을 주제로 다루는 에세이의 줄임말. 브런치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통하던 용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밥벌이의 숙명이 있기에, 브런치 고수들은 쓸 게 없다면 업세이를 먼저 써보기를 권하곤 한다. 알고는 있지만 그간 업세이를 한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우선 나의 프라이버시와 남의 프라이버시 중에 한쪽이, 혹은 둘 다 침해당할 것을 우려해서다. 어차피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적당한 수준의 자기 공개는 자연스레 하게 되니 내 사생활에 대해선 별로 걱정이 안 되었지만, 항상 문제는 다른 사람이었다. 만일 도서관 업무를 하던 과거의 내가 큰맘 먹고 업무중에 만난 이용자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고 해보자. 아무리 나쁜 얘기를 편집하고 좋은 얘기 위주로 싣는다곤 하지만, 내가 남에 대해 허락받지도 않고 공개적으로 글을 올렸다는 찝찝함은 언제나 찌꺼기처럼 남는다. 게다가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라서 내가 쓴 내용이 당사자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고백하자면 과거의 나는 내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 중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 내겐 그저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곳이었다. 일하면서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자주 혼났고, 혼나면 혼날수록 직장이 더욱더 싫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어떤 것에 대해 글을 쓰려면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을 내용으로 담기 마련이다.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는 내 일을 글로 쓴다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그동안 내 가치관이나 상황이 많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내가 당장 업세이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평생 글을 쓰면서 살아야 할 사람’으로 정의해왔다. 나와 남의 민감한 부분들을 보호하는 선에서 글을 실감 나게 풀어나가는 연습이 아직까지 부족하다면, 내가 앞으로 쓸 글에도 지금까지처럼 갖가지 제약이 덕지덕지 붙을 수밖에. 그리고 예전과 달리 업종이 아예 바뀐 지금, 나는 여전히 내 일을 사랑한다고 열렬히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제법 자부심을 가진 채 일하고 있는 참이다. 이 정도라면 이 일을 아낀다고는 당당히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찻잔 속의 폭풍 같은 과정을 거쳐 몇 개월간의 소득 없는 방황이 끝이 났다. 브런치의 인터페이스는 크게 변한 게 없어, 마치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그리운 집을 마주한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업세이를 올릴 때는 글의 퀄리티나 길이는 문제가 안 된다.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바가 있다면, 매주 정해진 날짜에 연재하는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밥이 되든 올리고 보는 것이다. 적어도 초고를 쓸 때만은 나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세 가지만 무난히 지키면서 글을 쓴다면, 미래의 나는 어느새 수북이 쌓인 글을 끌어안고 함박웃음을 짓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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