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이란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으로 적었습니다.
아,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나는 그저 정현이 사물함에서 핸드폰을 꺼내 계속 울리고 있는 알람을 끄려고 했을 뿐인데. 내가 본의 아니게 이 아이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 건가? 아냐, 다른 선생님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꼭 필요할 땐 아이들 사물함을 잠깐씩 여시잖아. 어제 센터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일하다가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럴 이유가 있어서 정현이라는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의 사물함을 무심코 열었다. 그런데 사물함 문 안쪽에 이런 내용의 쪽지가 붙어 있던 걸 보고 말았다. 짤막한 내용이지만 정갈한 글씨로 적어놓은 쪽지가 스카치테이프로 문 한가운데에 고정되어 있었다.
김정현 내 옆자리에 앉아.
- 세희가-
처음 봤을 땐 약간 당황했지만 당황했던 기분은 이내 소리없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앉을래?'도 아니고 '앉아'라는 확신에 가득찬 명령이라니. 이런 쪽지를 보낸 여자아이나 그 쪽지를 굳이 소중히 사물함 문에 붙여놓는 남자아이나 귀엽기는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서는 타락한 어른 특유의 연애 시뮬레이터가 부지런히 돌아갔다. 둘이 친해서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관계였다고? 성격상 아무래도 대시 자체는 털털한 세희가 먼저 한 것 같은데 정현이의 객관적인 매력이 대체 뭘까? 하긴 평소에도 언제나 제멋대로인듯 하면서 묘하게 시니컬한 개성을 보이긴 하지. 이미 알고 있는 여러 정황,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발견한 쪽지의 내용을 통해 잠시나마 즐거웠던 평일 오후가 되었다.
확실한 열정은 단순하다. 아이들의 당돌한 애정 표현처럼.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기보단 어른들에게도 세상만사의 법칙이 그러하다. 연애도, 공부도, 다이어트도 알고보면 똑같다. 주변 사람들이 자주 화제에 올리는 사랑 이야기와 연애 당사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랑 이야기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세상은 치열한 밀고 당기기 게임과 극적인 사건들에 흥미를 갖지만, 정작 당사자 두 사람 입장에서 잘 될 연애의 감정선은 대체로 깔끔한 편이다. 결국 이루어질 애정 관계일수록 두 사람 모두 마음 고생을 덜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공무원 수험생활을 몇 차례 경험해보았고 시험에 합격해서 일한 적도 있는데,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마인드 역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의 가짓수가 적을 수록 롱런에 유리하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5년간 이어가야 하는 지속가능한 수험생활을 버티는 일 말이다. 보디빌딩 선수가 아닌 일반인이 10kg 정도 살을 빼는 데에도 단순한 열정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대회에 나가거나 바디프로필을 찍을 목적이 아닌 이상, 머리 아픈 자료조사나 꼼꼼한 주 단위 월 단위 계획 따위는 불필요하다. 원칙은 오로지 하나다. 덜 먹고 많이 움직이기.
그러나 냉철한 이성을 통해 알고 있는 세상사의 일반 원칙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이리저리 가지를 쳐나가는 게 복잡미묘한 사람의 마음이다. 그건 나도 똑같다. 최근의 내 연애에서 조금이라도 예민한 이슈라면 역시 그거겠지. 내향적인 실내형 인간이자 기본적으로 얼마든지 혼자서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었던 이 남자가, 과연 얼마만큼의 자유를 손에 넣어야 비로소 행복해하고 만족할런지. 비정기적으로 그가 느끼는 현재 심정을 물어보고 대답을 들으면서 A/S를 뚝딱뚝딱 하고는 있지만 신경이 지속적으로 쓰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백날 계획이나 고치고 또 고치고 앉아있다는 건 다시 말해 다이어트가 맘먹은대로 안 되고 있다는 뜻이다. 매번 블로그에 업데이트되는 장황한 계획보다는 나의 체중 그래프와 매일 먹은 음식의 기록이 상황 파악에 백배는 더 유리하다. 작년에 수험생활을 하다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건강이 나빠져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도저히 생각이 많아져서 정신적으로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험생이 멘탈이 무너지면 끝이다. 그래서 공부를 끝냈다. 바로 그 멘탈이 무너졌기에.
지향점이 분명하고 확실하며 머릿속이 맑은 상태에서 삶을 꾸리고 싶다면, 지금이야말로 단순한 열정이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부정적으로 흐르기가 쉽고 생각의 방향이 부정적인 상태에서는 걱정을 수도없이 하게 된다.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90%는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것들이라는 누군가의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몇년 전부터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어놓고 꼭 필요한 물건들만 집안에 남겨놓는 '미니멀 라이프'가 우리나라에서도 각광받고 있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미니멀 라이프스타일은 집안 환경뿐만 아니라 우리의 멘탈에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머무르는 영혼의 방을 정돈하고 나를 쓸데없이 괴롭히는 생각과 감정을 줄여봐야겠다. 잘 되는 연애와 성공적인 수험생활과 원하는 체중에 도달하는 다이어트처럼. 그 언젠가 세희가 정현이에게 건네었을 단순한 열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