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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May 13. 2024

왜 이런 사소한 일에 화가 날까?

이상하다. 왜 이런 사소한 일에 이렇게나 화가 날까? 남편과의 통화가 있었던 건 두시간 전인데 나는 여전히 화가 나있고, 화를 풀기 위해 조금전의 통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특별히 충돌이 있었거나 서운함을 일으킬만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다. 내가 화난 이유는 알고보면 별거 없다. 그가 통화중에 말이 조금 없었다는 것, 그로 인해 대화에 버퍼링이 자주 걸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단한 언변을 자랑하는 게 아니니 이런 일은 그전에도 종종 있어왔지만 특히 최근 몇달 사이에 비일비재했다. 남편은 통화에서 점점 침묵이 잦아지는 풍경을 두고 언젠가의 일기에서 이렇게 평한 적 있다. 우리가 하고 있던 장거리 연애의 수명이 마침내 다한 것이라고.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뒤로 우리는 같이 살 집을 계약하고 혼인신고를 하고 서로의 호칭을 남편과 와이프로 바꾸었다. 이제 통화에서 내가 느낄만한 서운함은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서운함과 화의 씨앗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걸 오늘 발견하고 말았다. 하나도 좋을 게 없는 저 불화의 씨앗은 왜 자꾸만 생겨나는 것일까?


지금 당장 생각나는 이유들 중에 가장 단순한 건, 그저 그 통화가 이루어지는 타이밍에 남편의 컨디션이 영 별로일 때다. 컨디션이 별로라 함은 통화에 오롯이 집중하기 힘든 육체적·정신적 조건에 처해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태생적으로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줄줄 새는 타입이라 쉽게 피곤해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원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통화를 하다가 말수가 줄어드는 타이밍에 지금 잠 오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일쑤다. 연애 초기에는 혹시 그가 나와의 통화를 빨리 끝내고 싶거나 피하고 싶어 핑계를 대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한 적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별수 없이 통화를 종료해야 한다. 그럴 땐 쿨하게 꿈나라로 보내주면 되는데 나란 사람의 성격이 그렇게 생겨먹지를 못해서 통화가 삐걱거리게 된다. 이 상황을 더욱더 짜증나게 만드는 건 졸음이 오는 게 그의 잘못은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뭔가 잘못하고 있다면 추궁할 수라도 있는데, 졸립고 피곤하다는 건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 다음 원인은 나의 뿌리 깊은 불안 심리에 있다. 통화중에 흐르는 침묵이 내 안의 불안함과 초조함을 건드리는 상황이다. 오늘 아침만 놓고 보자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분노의 기저에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젯밤에 체중을 재보고 이건 정말 심각하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이 내 체중을 들으면 넌 여자로서 끝났다고 쉽사리 손가락질 할 수도 있을만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남편이 외모 상의 이유 때문에 어느샌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하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법적으로 헤어질 일은 웬만해선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쇼윈도 부부'라는 단어처럼 껍데기 같은 가족의 틀만 유지한 채 남남처럼 살아가는 부부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안그래도 우리 사이의 섹슈얼한 긴장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고, 나는 어젯밤의 내 체중을 생각하며 이 상황을 둘도 없는 위기라고 받아들였다. 오늘 내가 사로잡혔던 화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감정이 바로 이 불안감과 그에 따른 자격지심이 아니었을까.


다음 원인은 멀티 태스킹에 관한 남편과 나의 견해 차이다. 이 또한 첫번째 문단에 써놓았던 에너지 문제와 마찬가지로 내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남편의 성격적 특징에 관한 것이다. 남편은 나와 달리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한다. 멀티 태스킹이 일상화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와 통화를 하면서 친구와 카톡을 하거나 잔업을 처리하거나 마리오 카트 등의 조작이 간편한 게임을 플레이하거나 하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솔직히 지금까지도 쉽게 이해가 가는 부분은 아니다. 내게 있어 멀티 태스킹이라는 건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에 한가지 일에만 집중력을 기울여 빨리 끝내고 다음 일을 잡는 성격이다. 내가 평소에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 건, 가사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게 불가능해서 그렇다. 나와 남편 사이에 그만큼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기에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의견 일치가 안 되기도 한다. 남편은 남편대로 다른 일을 하면서 통화를 하면 긴 통화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들어서 좋지 않냐는 의견이고, 나는 나대로 네가 그러니까 통화의 질이 떨어지는 거라는 의견이다.


마지막 이유로 추정되는 부분은 우리 장거리 연애 및 주말 부부 체제의 수명이 다했다는 남편의 주장으로 대신하겠다. 사실 위에 써둔 모든 불협화음은 우리가 통화로만 소통해야 하는 평일에만 볼 수 있는 양상의 갈등이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고 몸을 부비며 스킨십을 할 수 있는 주말에는 이런 유의 갈등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문제들이 생겨날 때 우리는 제일 확실한 해결책으로 당장 만나는 길을 선택했고, 그렇게 선택한 만남은 갈등의 해결책으로 언제나 유효했다. 떨어져 있을 때 겪는 갈등을 만나서 해소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이런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붙어 있어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통화라는 소통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대화에 의존하는 컨텐츠라는 점 역시 치명적이다. 내가 언젠가부터 어떻게든 통화를 이어가기 위해 어렵사리 유튜브와 포털 사이트 등지에서 화제를 긁어모으며 느낀 바가 있다면, 오로지 통화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관계는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끝이 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끝을 이별이 아닌 결혼으로 마무리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이의 통화가 종종 원활하지 못한 데에는 지금까지 들여다본 바와 같은 여러 이유가 있다. 단순히 남편의 컨디션이 떨어져 있거나, 또는 통화에서의 침묵이 내 안의 불안 심리를 건드렸거나, 혹은 남편의 멀티 태스킹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근본적으로는 우리 장거리 연애 및 주말 부부 체제의 수명이 다한 경우다. 현재까지 찾아낸 유일한 해결책은 통화에서 침묵이 흐를 만한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 뿐이다. 다시 말해 통화 횟수를 줄이거나 일시적으로 통화를 피하는 것이다. 미봉책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이 방법은 지금으로선 꽤 유효하고 즉각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어차피 우리는 한달 후에 이사와 동거를 앞두고 있고 그러고 나면 오로지 통화에만 기대야 하는 평일의 소통방식 또한 종말을 고하는 마당에 미봉책이라도 못쓸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이 모든 갈등의 근원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결여가 있지 않나 싶다.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많다. 그렇게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 납득이 가는 일들보다 훨씬 더 많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배우자의 낯선 면모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통화로 말미암은 불협화음은 관용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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