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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May 08. 2024

주객전도

어제는 부모님과 함께 참 많은 일들을 했다. 온종일 가전과 가구 매장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견적을 짜고 주문서를 쓰고 최종적으로 계약을 했다. 가구는 4~5종류에 730만원, 가전은 3대에 500만원 정도였다. 할인, 이벤트 등 먹일 수 있는 것들 전부 먹여서 가장 합리적으로 구매한 가격이라고 한다. 가구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가전은 말도 안되게 저렴하게 계약하긴 했다. TV만 해도 최신 모델 65인치라는데 이것만 벌써 300이 훌쩍 넘어가지 않던가. 사실 물건들을 고르고 기나긴 설명을 듣고 협상해서 마침내 계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꽤 지난하고 심지어 피곤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나는 마냥 아이처럼 신이 나 있었다. 어차피 전부 나와 남편이 우리의 새 보금자리에서 쓰게 될 물건들이니까.


꿈으로 부풀었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이야기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끄집어내졌다. 아버지는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집을 매수할 생각을 지금부터 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하셨다. 신혼부부가 집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공·민간 신혼부부 특별공급 청약에 도전하는 길, 다른 하나는 청약을 통하지 않고 구축 아파트를 매수하는 길. 그런데 청약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있다. 혼인신고 후 7년 이내다.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보자면, 우리는 앞으로 7년 이내에 우리 명의의 집에 들어갈만한 기반을 마련해놔야 하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노후를 위해 자산 증식이 필요하단 건 알고 있지만, 우리는 아파트 매매는커녕 당장 전세금 마련조차 아직은 불투명한 상황이니까. 한없이 위로 위로 올려다보자니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주객전도라는 사자성어의 사전적 의미는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다'이다. 말 그대로 어떤 행동을 하는 주체가 오히려 그 행동에 묶여서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버리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 말대로라면 내가 돈을 모으기도 전에 김칫국 마시듯이 부동산을 공부하거나 여가시간 내내 결혼생활 준비와 같은 미래의 일에만 몰두하는 건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일이다. 언제까지 목 빠지게 위만 올려다보면서 숨가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전셋집 다음엔 자가, 자가를 마련한 다음엔 노후 대비를 위한 재테크, 그 다음은 도대체 어디일까?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평생토록 행복하기 위해 결혼하고 집을 마련하는 것이지, 집을 마련하여 자산을 늘리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밖에 살지 못하며, 그 어떤 재화도 내가 배우자와 함께 누리는 순간 순간을 대신하지 못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선 와전되어버린 욜로족의 의미대로 돈을 펑펑 쓰면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겠단 이야기가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영광만 쫓지 말고 우리가 현재 누릴 수 있는 소박한 행복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으면서 같은 길을 나란히 걸어가겠다는 이야기다. 그 소박한 행복이란 어찌보면 참 별것 아닌 일들이다. 주말에 차려 먹는 맛있는 한 끼 식사, 공원에서 밤산책을 할 때 코끝을 스치는 산들바람, 말없이 함께 몰두하는 책과 영화와 게임, 내 곁에서 깜빡 잠이 든 배우자의 평화로운 얼굴. 이런 건 거창하지도 불확실하지도 않은 것들이다. 결혼에 따라붙는 경제적 문제들이 버겁게 느껴지거나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있다면 한번쯤 돌이켜볼 만하다. 애초에 왜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는지. 또렷이 빛나는 그 이유 앞에서라면, 있는대로 부풀려진 근심걱정들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배우자와 더불어 살아가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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