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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Feb 27. 2020

꽤 괜찮은 일요일 밤을 보내는 방법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을 읽고

책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이 나오면 귀퉁이를 접어 놓는다. 거의 다 접을 뻔했다.


이 책은 '최인아 책방'이라는 독립 서점에서 만났다.


좋은 서점을 알게 되어 들뜨기도 했지만, 다 읽었을 때의 기분이 궁금해지는 책을 만나게 되어 기뻤다. 

샤워를 하고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는 순간을 상상했다.


서점 매대에서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카드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읽고 추천하는 말이 쓰여있었다.


'현재의 삶이 불안하여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읽으면 좋은 책. 나보고 읽으라는 소리였다.


소설에 빗대어 인생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얘기한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중학생 때 어떤 강의에서 책을 고를 때는 머리말을 읽고, 목차를 쭉 훑어본 다음에 그중에 흥미가 생기는 부분을 읽어본 후 고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기억이 서점에서 항상 날 귀찮게 한다. 어릴 때 배운 것은 왠지 좀 더 순수하고 고결해서 따라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냥 펼쳐 보지도 않고 샀다.


이 책의 추천카드는 아주 믿을만했다. 정말 그런 책이었다.

글을 자주 쓰지는 않지만 잘 쓰고 싶은 마음만은 많아서 그런지 소설을 쓰는 방법도 재밌었고, 중간중간 '아 그래, 인생도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구나'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쓸데없이 여러 후회들과 지나간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흔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책을 만난 건 분명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글을 이렇게 쓰고 있으니 말이다.


책에서는 일단 쓰라고 했다. 표현이 정제되어 있어서 그렇지, 내게는 '그냥 닥치고 써'로 들렸다.


소설은 소설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것이다.

작가도 처음에는 소설 작문법 책에서 '소설을 쓰려면 일단 사람이 돼라'는 말을 보고 쉽사리 시작을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소설은 일단 되는대로 쓰고 자신이 쓴 토고를 읽으면서 생각에 잠기고, 다시 쓰는 것(rewrite)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토고는 토가 나올 정도로 역겨운 원고라는 뜻으로 작가의 표현이다.


참 용기를 얻었다.


20대 초반에 했던 어리석은 시행착오와 창피한 실수의 기억이 떠올라서 좀 그랬지만,

남보다 반발짝 일찍 시도하고 실패한 다음에, 재도전을 좀 더 빠르게 하는 것이 내 전략이었는데 그게 괜찮은 방법이라고 응원해주는 느낌이었다. '남보다'라는 상대적인 비교만 빼면..!


소설의 플롯이라는 것은 끝까지 소설을 다 쓰고 나면 그제야 그게 어떤 플롯인지 결정된다고 한다.

소설에 빗대어 인생을 얘기했다는 추천 말이 맞는 게, 우리 인생도 잡스의 '커넥팅 닷'처럼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각 점이 무엇인지, 그 점이 어디에 놓여있는 것인지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라는 점을 찍고, 창업이라는 점을 찍고, 그다음엔 벤처투자라는 곳의 문 앞에 무작정 점을 또 찍었다. 이 점들이 그다음에 또 어떤 점을 낳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내가 찍은 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찍혔다.


첫 번째, 세상의 중심에 살고 싶다.

세상이 돌아가는 중심에서 그 변화와 생동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으면 좋겠다.


두 번째,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살고 싶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당당한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고 싶다. 나의 일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고, 이로 인해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하는데 기여하고 싶다.


창업을 했던 이유와 같다. 같은 이유로 나는 또 다른 점을 찍어본 것이다.

인생의 원인과 결과가 절대 일대일 대응은 아니니깐.


벤처투자자로 살면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일을 20대 중반의 나이에 바로 하기에는 여러 가지 단점과 제약이 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내게 일을 시켜줄 회사가 아직'은' 없다는 것이다. 좋은 회사에서 인턴을 하며 일을 배우고 있지만, 계약 종료가 다가올수록 계속해서 기회가 주어질지 생각이 많아진다. 


나에게 열려있는 문이 없다는 것은 지금 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인가? 

나중에 돌아보면 나 스스로도 후회할 만한 일인가?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가의 일>을 읽은 난 현재 일단 '못 먹어도 고'다. 일단 해볼란다. 


빠른 시일 내에 꽤 괜찮은 조건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현재 일에 충실하고 또다시 기회를 찾아서 일 하고, 그러면서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나아가고자 한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하나씩 늘려 가다 보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분명 생기지 않을까. 


내가 뱉어낸 것이 '토고'이더라도, 그걸 마주하고 고민해서 다시 뱉어낼 것이다. 

걱정하는데 쓸 에너지와 시간이 아깝다. 


일 하고, 

배우고, 

더 잘하게 되고, 

또다시 일하고.


그렇게 느려도 확실하게 나아가고자 한다. (박새로이처럼)


최근에 <클릭 모먼트>도 읽었는데,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난 묵묵하게 내 일을 하다 보면 되겠지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 이 책을 통해 그 희망이 어느 정도 나의 신념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깨달음은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일주일 내내, 하루 24간 중 12시간 이상 그 일을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다른 행동과 다른 생각을 하는데도 시간을 쓰면, 예상치 못한 좋은 경험도 하고,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안 가봤던 책방을 갔기 때문에, 안 읽어본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내일 월요일 출근할 때 저번 주 보다 좀 더 단단해진 확신을 갖고 집을 나설 수 있게 됐다. 


결국에 사람이 인생의 플롯을 만들어가고 클릭 모먼트를 만나서 꿈을 이루려면, 그 시간을 잘 버텨내야 한다.

그러려면 멘탈이 가장 중요하고, 멘탈은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멘탈은 좋은 경험을 통해 단단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나에겐 일 외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의무'이다.

일만 하는 것은 나태한 것이고, 방임이고, 무책임한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자꾸 경험하고 생각하고 쉬어가야 한다. 드라마나 유튜브를 보려는 핑계는 아니다. (솔직히 약간 헷갈릴 때도 있다..ㅎ) 그래도 내가 다음 주를 살아갈 힘을 얻고, 내일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 힘차게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면, 나약한 합리화는 아닐 것이다.


25살 내 나이. 중요한 시기이다. 

지금 내가 한 선택이 내 인생에 미칠 영향은 막대할 것이다. (정말일까..?!)

하지만, 망설이거나 기죽지 않으려고 한다.

일단 하고, 못하고 실수해도 다시 하고, 더 제대로 해내고, 이걸 계속 반복할 거다. 하루키처럼.


그렇게 반복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오늘은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브런치를 켜서 무지막지한 토고를 뱉어내니깐 벌써 이만큼이나 썼다. 

앞으로 쓰고 싶을 땐 바로 노트북을 열고 멍이라도 때려야겠다.


내일이 월요일인데, 기대가 된다.

꽤 괜찮은 일요일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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