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상 Mar 01. 2020

해보지 않아도 알만한게 있지 않나요?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을 읽고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은 <시간의 궤적>이다.

작가노트에 따르면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관계가 꽃처럼 피었다가 결국 저버리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만난 두 한국인 여성이다.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떤 결말일지 왠지 예상이 됐다. 그래서 좀 불안했다. 

안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급작스럽게 발전한 관계는 그 기저에 구멍이 송송 뚫려있을 것 같아 불안하다.

(<클릭 모먼트>를 읽었지만 난 여전히 '우연'한 기회가 좀 못 마땅한 것 같다...ㅠ)

불안한 이유는 내가 그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진행 중이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이 브런치가 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다.

이렇게 익명의 뒤에 숨어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너무 답답했을 것이다.


깊게 가는 관계는 항상 그렇듯 우연한 계기로 발전하고, 서로 운명인 것처럼 잘 맞다고 생각한다.

오래 만난 연인과도 그랬고, 현재 진행 중인 그 친구와의 관계도 그랬다.

그 친구는 소설과 같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경제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에 고급 술집과 식당을 데려 다녀줬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많이 했고, 돈을 벌고 싶다는 동기부여도 많이 됐다. 어린 나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인격을 존중했고,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추억만큼 그 친구가 이해되지 않은 순간도 쌓여갔고, 때로는 지긋지긋한 연애의 쉰내가 느껴지기도 했다.

관계의 깊이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견디기 좀 버거웠고, 서로의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게 됐다.


결국 복합적인 요인과 복잡한 타이밍이 만들어준 기회를 통해 그 친구와의 관계를 조정하게 됐고, 

우리는 조금 멀어졌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내가 준 상처가 더 컸고, 우리는 그 이후로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연락을 하고는 있지만 그 상처에 관해서는 모른척하고 있다.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일임을 알지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않고 있다.

그 사과가 진심이 되려면 나도 그에게 많은 얘기를 해야 하지만, 이젠 그러기가 싫다.

피곤하다.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는 행위를 하기 싫을뿐더러, 어차피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더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그만하는 것이 그나마 지난 추억을 지키는 방법인 것 같다.


거리를 좀 두는 것이 그걸 지키는 방법이라니.. 참 아쉽긴 하지만, 별도리가 없어 보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클릭 모먼트'가 올 수 있으니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지내보기로 한다.

(이렇게 지 유리 한대로만 클릭 모먼트를 남발한다 ㅎㅎㅎ...ㅠ)


작가노트에서는 주인공이 친구에게 끝내 사과를 하지 않은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소설 속에서 '나'는 끝내 사과를 하지 않는데, 그것은 '나'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나빠서라거나, 더 비겁해서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며 아파하면서도 타인의 상처에는 태연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이미는 그런 존재들이니까.


하.. 그렇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시간이 드러내는 진실이 그토록 하찮은 것뿐일지라도,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순간들, 온기를 나눴던 순간들,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라고 말해주던 순간들마저 온통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 작가님은 이렇게 날 들었다놨다 했다.








참, 잘 풀어낸 것 같다. 관계가 맺어지고 흐트러지는 과정을.


그렇게 난 지금 어떤 친구와 의도했던 아니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관계가 오래 유지되려면 거리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좁힐 수 없는, 좁혀서는 안 되는 적절한 한계의 필요성이 느껴질 때면 마음이 좀 답답해지기도 하지만, 

그게 사람 마음인 것 같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좁혀서는 안 되는 간격을 넘어버리고 싶을 텐데, 그 짜릿한 유혹을 이기지 못할 텐데, 그러면 그때의 고통이 또 반복되겠지..


"시작도 안 해 놓고 깨질 걱정부터 하는 건 좀 오버 아닌가요?"

라는 말을 얼마 전 드라마에서 들었다. 맞는 말이다. 오버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답하고 싶었다.


"해보지 않아도 알만한 것도 있잖아요..?"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꽤 괜찮은 일요일 밤을 보내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