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스킨과 밥장
스물다섯의 나는 다녔던 편입 일러스트 학원에서 ‘편입 일러스트 강사’를 제안받았다. 입학과 동시에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강의를 해야 했다. 수업이 끝나기가 바쁘게 사라지는 불성실한 학생이었지만, 학원에만 가면 누구보다 열정적인 강사였다. 편입 재수까지 해가며 입시를 치러본 터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을 걸고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허투루 시간을 쓸 수 없었다.
전임 강사는 처음이었다. 정해진 지침도 없어서 나만의 커리큘럼을 짰다.
그중 하나가 ‘토요 미술관 산책’이었다. 토요일 오전, 종로 3가 낙원상가 앞에서 만나 인사동 미술거리의 무료 전시를 보고 점심을 먹는 작은 모임. 일러스트는 형식과 재료의 제한이 없는 분야라,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선 결국 많이 보고 느끼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날, 우리는 ‘밥장의 비정규 아티스트의 홀로그림’ 전시를 보게됐다. 형형색색 과감한 컬러, 검정색 라인의 대담한 드로잉. 일러스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전시였다. 나는 전시장에서 그의 책을 한 권 샀다. 대기업 사무직 출신의 남자가 서른여덟에 그림을 시작해, 단기간에 대중의 주목을 받고 책을 내고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과정이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는 그림 이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던 파워블로거였다.
그때까지만해도 ‘밥장’이란 사람 자체보다 그의 그림 스타일에 매료돼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림 그리듯 스케치 없이 검정색 펜 하나로 빈 종이를 채워가는 방식. 동글동글한 선, 투시와 상관없이 보이는 대로 옮기는 그림. 남은 여백에는 상상을 이어 라인을 덧붙였다. 이 방식이 묘하게 중독적이라 과제할 때도, 일상에서도 자주 낙서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딱딱한 입시 미술의 틀을 벗어나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것’을 그리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디자인 에이전시에 취업하면서 야근과 철야가 쌓이는 속도만큼 그림은 멀어졌다.
회사-집-회사.
일도 꿈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불안한 상태에서, 스물아홉에 권고사직을 받았다. 남은 건 시간뿐이었다. 다시 블로그를 열었다. 이웃으로 추가해두었던 밥장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그림이 아니라,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는 그의 일상을 읽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그가 몰스킨 매니아란 사실을.
그의 글 속에서 건진 한 단어, ‘일점호화주의’. 정말 좋아하는 한 ‘점’에는 아낌없이 사치하라는 뜻이다. 나도 몰스킨에 꾸준히 기록을 남기고 공유하면, 언젠가 내 기록을 좋아해주는 팬이 생기지 않을까. ‘좋은 기록이 쌓이면 나도 나만의 책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지만 분명한 희망이 생겼다.
그날,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검정색 플레인 소프트커버 몰스킨 한 권을 샀다.
백수였던 나에게 3만원은 큰돈이었지만, 내 첫 ‘일점호화주의’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검정색 표지를 열면 크림색 첫 페이지. ‘In case of loss, plase return to:’
이름과 연락처를 적는 줄 아래, 나는 이렇게 적었다.
“위대한 생각을 담으려면 최고급 노트가 필요한 법이지”
-영화 <네버랜드를 찾아서> 中 조니뎁.
본적도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밥장이 몰스킨에 필사했던 문장이었기에, 그대로 따라 적었다.
따라쟁이. 그야말로 손민수였다.
그리고 5센치 정도 여백을 둔 채 날짜를 적었다.
2011년 1월 10일~
처음으로 끝까지 다 쓴 노트, 몰스킨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렇게 첫 몰스킨은 끝났고, 그 다음 노트들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