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일부를 훔치다

꾸준한 기록에 도전해 본 경험, 롤리(박신후)의 1d1d

by 문덕지름이

꾸준한 기록에 도전해 본 경험, 롤리(박신후)의 1d1d


sns 플랫폼이 바뀔 때마다, 나는 또 누군가의 일상을 훔칠 준비를 했다. 싸이월드에서 블로그로, 블로그에서 인스타그램으로. 그 흐름 속에서 ‘롤리후’라는 계정을 발견했다. ‘롤리’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박신후 님은 행복을 파는 브랜드 ‘오롤리데이’의 대표이자 인플루언서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일상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밥장을 따라 했던 것처럼. 그녀는 브랜드를 운영하면서도 #1d1d, 1일 1 드로잉이라는 해시태그로 매일의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었다. 그 꾸준함에 자극을 받아 나도 매일 그림을 그리는 일상을 내 삶에 들여왔다. 이번에도 삶의 일부를 훔친 셈이었다.



2016년 당시 인스타그램, 블로그에 올렸던 그림일기 기록들




왜 하필 ‘그림일기’였을까. 지금 돌아보면 이유는 단순했다. 힘들었고, 답답했고, 어딘가로 새어 나갈 구멍이 필요했다. 2016년 8월. 나는 4년 반 동안 전임강사로 일했던 아동 심리미술교육 교습소 ‘아트앤하트’에서 ‘당일 해고’라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여름휴가도 미루고 모든 수업이 끝난 날, 청소까지 마치고 인사하러 들어간 원장실. 그곳에서 낯선 두 사람을 만났다.


“선생님,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원장 선생님께 전달받지 못하셨나요?

내일부터 저희가 이곳을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원장 선생님께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뚜르르 신호음만 이어졌다. 그날도, 다음 날도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화를 느끼면 소리를 지르기보다 오히려 말하는 신경 하나가 툭 끊긴 듯 입을 다물게 된다는 걸.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는 것도.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이 해고를 당한 날 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댕강 잘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집에 도착해 무의식적으로 노트를 펼쳤다. 그림을 그리고 날짜를 적었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잘린 나무에 다리를 달아준 그림이었다. 잘 그린 것도, 예쁜 것도 아니었지만 그날의 내 마음과 정확히 같은 모양이었다. 좋아요 수는 많지 않았지만 대나무숲에 소리치고 나온 것처럼 가슴속 갑갑함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음 날도 그렸다. 이번엔 같은 나무에 ‘싹’이 올라와 있었다. 다리에 줄무늬를 그리고 ‘싹이 났다’는 글자도 적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다시 보니 나는 그림일기로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었다.







하루 만에 잘린 나무에서 싹이 나다니. 이보다 효과 빠른 약이 있을까.

강제로 주어진 자유 시간. 화방에 가고, 도서관에 가고, 부당 해고를 했던 원장 선생님을 상대로 퇴직금을 받기 위한 법정 소송을 준비했다. 낮엔 개인 시간이 필요했기에 밤에는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직 전까지 그렇게 1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승소했고 성수동의 한 종이 회사에 취업했다.


디자이너는 1명, 나머지는 생산과 영업으로 이뤄진 작은 회사였다. 몇 년간 그림책 작가 활동과 아동미술 강사를 하며 손그림엔 익숙했지만 컴퓨터 그래픽 중심의 실무에서는 손이 굳어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업무 시간에 상세 페이지를 만들며 그림으로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던 내 모습을 상무님이 보셨다.


“이 종이에 그림 샘플 한번 만들어볼래요?”


아직 상품화 전인 다양한 종이에 여러 재료로 그림을 그려보는 일을 맡게 됐다. 매일 해오던 일이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만족스러워했다. 그때부터 웹디자인 업무 비중은 줄고 회사의 종이를 여한 없이 써보는 자유가 늘었다. 신규 상품 기획과 디자인, 제작까지 마음껏 실험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디자인에 대한 감각, 자신감도 돌아왔다.


그리고 회사 근처에 ‘서커스보이밴드(줄여서 CBB)’ 오프라인 숍이 생겼다. 문구 덕후인 나에겐 또 하나의 방앗간이 열린 셈이었다. CBB에서 매일 드로잉 할 새 노트를 장만했다. 한 손에 잡히는 32페이지의 작고 얇은 노트. 겉면에는 ‘30일 꾸준히 프로젝트’라고 적었다. 무지인 왼쪽엔 드로잉, 줄이 그어진 오른쪽엔 글을 남기는 형식을 염두하고 선택한 노트였다. 달리거나 걷고 난 뒤 그날 들었던 플레이리스트, 당시의 기분, 하루 중 인상적인 장면들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30일을 모두 채우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2017년 11월 9일부터 22일까지, 목표의 절반을 성공하는 경험을 했다.



<'30일 꾸준히 프로젝트' 노트 기록>




불과 1년 전, 검은 연필뿐이던 내 그림에 색연필과 마카, 펜의 색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의 일부를 훔치게 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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