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즐겁게 남기는 기록, 문구인 규림님의 삶을 흠모하며
문구덕후라면 ‘문구인, 김규님’을 모를리 없다. ‘문구인’. 이 얼마나 간결하고 직관적인 이름인가.
<아무튼, 문구>를 시작으로 <뉴욕규림일기>, <일놀놀일>, <매일의 감탄력>까지 그녀의 책을 읽었다. 요즘 생각을 기록하는 ‘목요일의 글쓰기’, 잘쓴 물건들을 기록하는 ‘소비예찬’을 종종 훔쳐보며 나는 문구뿐 아니라 일상을 기록해 콘텐츠로 만드는 태도를 배웠다.
어떤 물건이나 브랜드가 좋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끝까지 궁금해졌다. 찾아본 결과와 내 관점을 함께 남기는 지금의 기록 패턴은, 그녀가 참여했던 기록 전시 ‘소소문구 - 아임디깅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디깅노트’는 왼쪽 페이지에 수집한 대상을, 오른쪽 페이지에 그로부터 파생된 생각을 적게 설계된 노트다. 한 권을 3년에 걸쳐 쓰고 나서야 알게됐다. 기록도 쌓이면 결국 나만의 기록 규칙이 생긴다는 것을.
따라 사본 물건도 많다. 시작은 ‘디플로마트 트래블러스 블랙락카 은장 만년필’ 이었다. 만년필은 남편이 연애할 때 선물해준 ‘라미’로 입문했지만 어느 순간 잊힌 물건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규림님이 즐겨 쓰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따라 샀다. 다만 글씨가 작은 나에겐 펜촉이 두꺼웠고, 딱 맞는 필기감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결국 만년필 전문샵에 가서 여러 가지를 시필해 본 끝에 파이롯트의 ‘프레라’ 같은 세필이 잘 맞는다는 걸 발견했다.
시작은 물건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물건을 고른 사람, 물건을 설명하는 사람, 물건을 팔기보다 자신의 철학,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더 오래, 깊이 바라보게 됐다.
가장 영감의 화수분 역할을 한 것은 규림님이 숭님과 함께 ‘두낫띵클럽’이라는 듀오로 참여한 유튜브 채널 ‘MoTV’의 현실조언 시리즈, 그리고 ‘노동절 팝업’ 이었다.
MoTV는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 ‘모베러웍스’라는 브랜드를 시작하며 기존 디자인 브랜드의 문법을 과감히 무시했다. 보통은 완성된 결과만 보여주는 대신, 아무것도 없는 기획 단계부터 회의, 샘플링, 제작, 설치까지 모든 과정을 날것 그대로 공개했다. 그 방식은 당시 업계에 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하는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기념일, 5월 1일 노동절. ‘퇴사 후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결성한 ‘두낫띵클럽’의 규림님과 숭님을 첫 파트너로 섭외해 진행한 노동절 팝업 프로젝트를 보며, 나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으로 기획을 시작하고, 어떻게 실행하며, 결국 사람들과 연결되는지를 대리 경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모습이 유쾌하면서도 닮고 싶었다.
이 에피소드를 계기로 덕질은 모베러웍스로 확장됐다.
‘현실조언 시리즈’를 즐겨보며, 포인트오브뷰 대표 김재원님, 배달의 민족 전 마케팅 상무이자 현 스테이폴리오 대표 장인성님, 그리고 문구와 응원에 진심인 메타의 올리부 상무님의 인터뷰를 보며 이내 그들의 팬이 됐다.
김재원님은 ‘성공한 덕후’의 표본 같았다. 문구로 이렇게 넓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니, 덕질이 일로 연결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사례였다.
장인성님은 이미 팬이었던 규림님과 숭님이 ‘닮고 싶은 어른’으로 꼽는 사람. 만약 내 직장 상사가 이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많이 배울 수 있을까, 상상하게 됐다. (추후 나는 마음 성장 플랫폼 ‘밑미’에서 1km로 시작하는 달리기’ 리추얼의 메이커였던 인성님의 리추얼을 신청해서 3년간 함께 달리고 치어리더로도 활동하게 된다.)
올리부님은 ‘좋아하는 마음은 닳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이었다. 문구에 대한 애정, 수집력은 물론이요, 글로벌 그룹인 ‘메타’에서도 한 팀을 이끄는 리더이자 스스로를 ‘응원대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따뜻함과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었다. (올리부님 또한 밑미에서 ‘매일의 영감수집’ 리추얼의 메이커로도 활동 중인데, 이런 어른이 가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나 역시 그 리추얼에 참여했었다.)
이렇게 닮고 싶은 사람들에 둘러쌓인 삶이라니! 좋은것들을 가까이 두려는 마음은 자기돌봄으로 이어진다.
매일 보는 사람, 매일 보는 물건이 행복한데, 일상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구에서 시작된 관심은 기록으로, 기록은 물건으로, 물건은 사람으로, 그리고 사람은 관계로 이어졌다.
밥장님에게서 그림의 형식을, 오롤리데이 박신후님에게서 습관을 훔쳤다면, 규림님을 통해 나는 기록이 삶의 취향을 만들고 태도가 되는 과정을 배웠다. 이전까지의 기록이 ‘남기기’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기록을 통해 지금의 나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조율하는 일이 되었다. 새로운 물건을 들이면 무엇이 좋았고 아쉬웠는지 적어보고, 디자인을 넘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궁금해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렇게 일과 놀이, 기록과 관찰, 소비와 사유가 뒤섞인 일상은 어느새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리듬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규림님으로부터 취향을 훔쳐온 ‘일놀놀일’의 방식이다.
이 디깅노트는 여러 사람에게 내 생각을 더 잘 전달하고 싶어서, 생각을 정리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문장수집과 관점기록 방식을 처음 시도해 본 기록이다. 그리고 이 노트는 3년에 걸쳐 완성됐다.
'티나지 않는 최선'이라는 문장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바로 이거지.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답장을 받는다면,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 귀한 경험을 삶의 태도로 삼은 규림님이 더욱 멋지게 느껴졌던 기록.
좋은 문장을 만나면 옮겨 적고, 옆에 나의 생각을 덧붙인다.
읽고 끝나는 독서가 아니라, 나의 관점을 키워가는 독서가 되었다.
소소문구 아임디깅전에서 만난 규림님의 기록.
'굳이?' 라는 질문 하나가 마음에 오래 남았고, 나는 그 질문을 디깅노트에 옮겨 적었다.
3년에 걸쳐 기록한 디깅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모베러웍스가 '무비랜드'로 변화하던 첫 시작,
2023년 노동절 100명 한정 '성공기원제'에 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되어 다녀온 귀한 경험이 이 노트의 마지막 장으로 남아있다.
3년에 걸쳐 쌓인 이 노트는 규림님에게서 훔쳐온 취향이 어떻게 나의 기록이 되고, 어떻게 나의 삶의 태도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훔친 취향은 결국 나만의 세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