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언젠가 멋있는 사람을 만난 적 있다.
외모도, 자기관리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어느날 내게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때 조금 고민하다 그럼 이번주 주말에 보자는 답을 했다. 그 사람이 끌려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한테 진심으로 호감이 가서가 아니었다.
이런 멋진 사람과 데이트를 하면 남들이 나를 좋게 보지 않을까?
***
지금 내 목엔 목줄이 하나 있다.
인간인데도 목줄이 걸려 있다. 이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아무튼 그렇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 몸의 주체자인 나라도 스스로 끌어 목도리처럼 두르고 목줄이 아닌 척하고 다니기라도 해야 할 터인데, 나는 지금 그러고 있지 않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내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이 목줄의 손잡이를 건네고 있다. 이래야 당신이 나를 좀 멋있게 보려나요. 이걸 해야, 이 사람과 데이트를 해야 당신들이 나를 좀 부럽게 보려나요.
그 키워드를 늦게 알고 나서야 나는 그 당시 내가 그 남자와 만나며 들었던 이상한 감정의 근본을 깨우쳤다. 어릴 때는 단순히 내가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소심한 아이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다 크고 나서 세상을 좀 살다보니, 나는 남의 시선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 속에서 빛나는 나의 모습을 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인정 받고 싶어서.
나는 왜 누군가의 인정에 목마르게 된 것일까?
학교를 다니며 요즘 내가 제일 많이 하는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을 땐 참지 않고 와르르 저질러버리면서도, 또 어떤 때엔 그러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어가기도 한다. 누구 앞에서만 그렇게 되는가 보았는데 유독 나와 오래 얼굴을 보고 친한 사람들에게 그러는 것 같았다. 오히려 안지 얼마 되지 않은 이에겐 하고자 하는 말을 잘 하는데, 오래 얼굴을 봐왔고 친한 사람들에겐 그러지 못한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사람들의 '평가' 속에서 내가 어떠한 성격과 이미지의 인간으로 결정났을지 대략 예상이 되어서, 그것을 깨기 싫어서일까?
그래서 나를 붙든 키워드는 바로 불안감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안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행동'에 대한 불안감.
내가 이 말을 하고 이 행동을 했는데,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이 사람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볼까. 그러다 혼자 상처를 받는 우스운 상황도 생긴다. 어릴 땐 이 사람이 내게 대하는 행동과 말투를 보고 '아, 나를 좋아하진 않는구나.'가 느껴지면 그게 꽤나 힘들었고, '아, 나를 싫어하는구나.'가 느껴지면 그게 많이 힘에 겨웠다.(그나마 다행이라면 나와 안 친한 사람들은 신경을 안 쓴다, 얼굴을 좀 보았던 사람들에게만)
특히나 상처를 많이 받는 순간들은 이것이다. 이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안 좋은 생각들을 할지 너무 눈에 선하게 보일 때, 그것이 특히 나와 얼굴을 꽤나 오래 본 사람일 때. 그럴 때 나는 상처를 받는다. 참으로 피곤한 인생이다. 나 살기도 바쁜 세상에 남의 평가를 의식하느라 스트레스를 만땅 받는 내가. 내일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 이 분이 이런 내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라는 생각에 날밤을 새우는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웹소설 작가로 회사도 아니고, 어떠한 공동체에 속하지도 않고 그저 집에서 혼자 열심히 집필했다. 남들 다 학교 가던 19살에 입학하지 않고 돈을 벌었던 나는, 25살이라는 나이에 느지막이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 인간관계, 사회 관계가 무려 고등학생 시절에 멈춰 있었다. 그런 내가 다시 사회에 속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게 되니 좋은 점도 물론 너무나 많았으나 반대로 힘겨운 점도 참 많았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모두의 눈에 좋은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으로 보이길 원한다. 내가 정말 친해지고 싶을 만큼 좋은 성격의 친구들을 보면 말은 못하지만 많이 부러워 한다. 그런 성격이라 좋겠다. 나도 너와 같으면 참 좋겠다.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할 줄 알아서 참 부럽다. 나는 이렇게 너를 어색하게 대하는데, 너는 나를 이토록 친근하게 대해서 참 고맙고 부럽다.
이러한 점은 내가 일할 때에도 큰 스트레스 요인으로 다가온다.
나는 일할 때 내가 느끼기에도 가끔 '꼰대 아저씨' 같을 때가 있다. 융통성이 떨어지는 순간도 많고, 고집도 세고, 의견을 듣긴 하나 내가 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그렇게 추진하고자 원하는. 이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이러한 면을 많이 누르려 노력했으나 여전히 백퍼센트 나아지진 않았다. 이러한 내 성격에 남의 평가를 의식하는 겁쟁이 같은 면이 추가가 되니, 내가 얼마나 밤마다 오늘 내가 저지른 행동들에 대해 재단을 하는지 감히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왜 이런 성격일까? 이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대할까? 이 사람과 틀어지고 싶지 않은데. 이 사람이 나를 좋게 봐주었으면 하는데. 그래, 내가 먼저 평화적으로 나가면 이 사람도 그렇게 나오겠지. 그렇게 우리는 잘 지낼 수 있겠지.
이러한 생각들로 사람들을 대해왔는데 이러한 내 행동에 고맙게도 잘 수긍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내 모습을 오히려 만만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순간에 내 마음은 많이 너덜너덜거렸다. 그 상처의 기저를 보면 사람들과 다투고 싶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그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를 받기 싫어하는 내 모습이 있는 것 같다.
혼자 작가 일을 할 땐 내가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다. 중고등학생 때엔 가치관이나 신념, 성격 같은 것이 제대로 잡혀지지 않았을 때니 인간관계가 어려운 건 없었던 것 같은데(오히려 그때가 더 편했던 것 같다. 누군가 나를 무시해도 '왜 저러징...'하고 넘어가고 다음날 잊었던 것 같으니) 지금은 그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나면 우선 '내가 잘못된 말을 했나?'라고 내 행동부터 먼저 확인하고 나선다.
어른이 되는 것일까.
이게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라면 하늘에게 너무하다고 원망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힘에 겹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 이제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 너무 지겹고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처럼 모든 걸 생각없이 넘기고 싶은데.
인정중독이라는 것을 유튜브에서 말씀해주신 김주환 님의 25분 강의를 보았다.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 모든 선택은 사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내 모든 행동들,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이 모든 원인들도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내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해서 요즘 많이 고통스럽다. 생각없이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다. 내 행동과 말과 선택엔 꼭 남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고 그 덕분에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나는 곧장 크나큰 자기혐오에 휩싸인다.
그러다보면 그냥 도망가버리고 싶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적어도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작년 여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유럽 여행을 갔었다. 원체 집에만 있길 좋아하는 집순이인 내가 무려 친구에게 뜬금없이 유럽 여행을 제안했다. 한국말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나를 평가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의 틈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 의미로 그 여행이 그리도 재미있었다. 정말,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그곳에서 전에 느낀 적 없던 자유 아니 해방을 느꼈다.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나를 판단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의 세상, 그리고 한국과는 다른 문화,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 살며 간절히 해보고 싶었으나 여태 해볼 수 없었던 것들을 잔뜩 했다.
같이 간 친구가 외국에서 영어를 쓰는 너는 아예 다른 사람 같다는 말을 했다. 소심한 나는 거기서 스스럼없이 이웃들에게 인사를 걸었고, 스몰토크를 늘 나눴으며,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너무나도 자유롭게 마치 친구처럼 춤을 추고 커피를 마시고 대화하며 놀았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일절 없이. 옷도 마찬가지로 입고 싶었던 것들을 마구 입었다. 사람들이 이 옷을 입은 나를, 내 몸을 어떻게 평가할까 라는 두려움은 전혀 없이 입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입고 다녔다.
그때 나는 생애 처음으로 제대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참으로 희한한 경험이었다. 알고 보면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 아닐까. 생각보다 나는 꽤나 외향적인 인간 아닐까. 남의 평가와 시선에서 벗어난 나, 이게 바로 내 진짜 모습 아닐까.
한국에 돌아오니 나는 다시 남의 시선과 평가를 두려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또 다시 내 옷차림과 말투와 행동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한 달, 유럽에서 머문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다짐했다. 무조건 다시 유럽이든 미국이든 한국을 떠나겠다고.
단순히 문화의 차이에서 온 신기한 경험이었을까? 단순히 영어가 존댓말이 없어서 나온 자유로움일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조금 빌려와서, 내 외모를 최초로 지적한 이가 한국인 남자인 아버지라서, 아직도 나도 모르게 한국인 남자를 보면 이러한 점을 무의식 중에 신경쓰게 되는 것일까?
내가 왜 이렇게 남의 시선에 크게 의식을 하기 시작했나-
그 근본을 천천히 따라가면 그 기억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시작된다.
"네 동생은..."
내가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그런 말을 많이 하셨다. 나보다 비교적 키가 크고 늘씬한 동생을 같이 비교하셨고, 어린 나는 그게 어른의 장난이고 농담이어도 계속 들렸고 무시할 수 없었다. 무의식이 그리도 무서운가보다. 그 당시엔 내가 그런가보다 하고 넘긴 줄 알았는데, 어느순간부터 나는 정말로 동생과 나를 비교하며 내 외모에 대해 부쩍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남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 생긴 것 같다. 아빠가 장난 삼아 하는 외모에 대한 평가적인 말들, 동생을 비교하는 말들, 그로 인해 나부터 내 스스로 내 몸을 평가하기 시작했고 남들이 나를 볼 때도 아빠처럼 생각할까 두려웠다. 얼마나 심했냐면 초등학생 6학년 때, 한창 사춘기가 시작되어 외모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높아졌을 땐 아예 길거리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정말 푹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는 내 신발 앞코만 보며 걸었던 13살 나의 시야가.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웃으며 내 옆을 지나가면 내 얼굴을 보고 웃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얼굴을 숙이고 다녔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아서.
중고등학생 땐 다행히 좋은 친구들을 만나 외모에 대한 자기혐오는 많이 나아졌으나, 여전히 나를 스스로 재단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큰 후유증처럼 남아 있었다. 지금도 물론 그렇다. 옷 하나를 입을 때도 이거는 내 약점이 너무 잘 보여서 안 되고. 이거는 너무 뭐해서 안 되고. 호감 있는 남자와 데이트를 할 때, 이 남자 앞에선 무조건 외모적으로는 완벽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더더욱 신경을 많이 쓴다. 조금의 취약점을 보여선 안 된다는 강박이 생긴다.
극작을 배우다 보면 모든 캐릭터의 행동엔 결핍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에겐 결핍이 있고, 그로 인해 욕망이 생기고, 그러한 결핍을 보호하고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행동을 실행한다. 대개 이러한 캐릭터들의 결핍은 어릴 적의 기억에서부터 오는 것이 많다. 바로 나처럼.
여전히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인정중독에서 벗어나고 남의 평가를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지. 하나의 방법으로 sns를 모두 끊는 것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생각해오고 있는 방법인데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간인만큼 그것이 제일 어려워 아직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인스타그램 업로드 횟수를 많이 줄였다. '이걸 올리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보겠지?'라는 생각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올리고 싶어서 올리는 것들. 결핍에서 오는 과시욕구로 휩싸인 게시물이 아니라. '강력한 또 다른 매력 자아'로 오판되는 sns 속 나에게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 미성숙한 인간인 것 같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엄마아빠 품에서 아직도 아기로 남고 그 어떠한 스트레스에도 휩싸이지 않기를 원하는 나는, 아직 인간과 세상이라는 거대한 숲에 덜 길들여진 것 같다. 김주환 님께서는 인정중독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인의 눈에 내 삶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사랑하고 나만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그게 맞는 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야 내가 한때는 매서운 폭풍이 불기도 하고, 새벽의 이슬을 머금어 촉촉한 일출을 보이기도 하는 이 숲에 적응을 할 터인데 쉽지가 않다.
전의 글에서는 '사랑에 빠지기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썼는데, 이번 글에선 이렇게 적고 싶다.
아직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남의 시선에서 완벽히 벗어나긴 너무 어렵다. 하지만 차차 노력해보고자 한다. 하루 한 번 명상을 해볼까 싶기도 하고, 며칠 sns를 완전히 끊어볼까 싶기도 한다. 평온함을 느끼는 성당이나 절에 더 자주 가서 생각을 정리해볼까 한다. 그러다보면 남의 시선과 평가에 휩싸인 내가 아닌 진짜 나를 깊이 알 수 있지 않을까.
삶을 살다가 '어, 이거 인스타그램 감인데. 사람들이 이걸 보면 좋을 것 같은데.'라는 괴상망측한 생각에 휩싸여 진정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일은, 벌어나지 말아야 하니까. 그러다 보면 모두의 눈에 착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 강박이 언젠가 점점 나를 놓아주지 않을까. 모두가 내 얼굴을 보고 웃는 것 같았던 13살의 겨울을 차츰차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 너, 괜찮아?
세희 생각보다 어릴 때 기억들은 되게 오래 간다. 어릴 때 아 버지가 내게 했던 말들, 내가 그때 했던 생각들… 뼈저. 리도록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 너무 선명해서 뇌를 꾹. 꾹 눌러버리는 것들이 있어. 스스로를 사랑하세요. 나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들 말만 쉬워. 사랑도 모르고 나 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사이) 그래서 나는… 아직 1 3살의 그 겨울이야. 10년이면 다 잊을 줄 알았는데 딱. 지가. 여전히 내 발 뒤꿈치에 덜렁덜렁.
내일의 내가 부디 더 사랑에 유연해지는 인간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남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향한 사랑을. 당신 뿐 아니라 내게도 너무나 어려운 과제인, 그 당연한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