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의 '별(別)'이 나를 잠시 과거로 소환함
이런 날 안다면 웃으며 너는 돌아올까
처음만 자유롭던 이별에 무얼 해야해
혼자남은 시간슬픔을 둘곳없이 헤맬 뿐 후회하는 내게
다시 오라하면이기적인 날용서해 주겠니, 남은소원 나 하나라면널 보고싶어
Wherever ever you goever you go 내맘깊은 곳에넌 사는걸
Ever you goever you go 너를 사랑해내게 준 이별까지
하늘같은 곳에 살면서너를 볼수없어 세상끝보다 멀리있는 너 여기 이골목 돌아서면널 볼수있나
Wherever ever you goever you go 내맘깊은 곳에 넌 사는걸
Ever you goever you go 너를 사랑해내게 준 이별까지
우연히 출근길 라디오에서 '팀'의 '별(別)'을 들었다. 이런게 음악의 힘일까? 갑자기 팀의 노래와 함께 나를 1999년으로 되돌려보냈다. 요며칠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나는 현실적응이 안되었고, 마음이 1999년에 머물러 있었다. 아마도 그시절로 잠시 돌아가서 오늘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해줄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1999년의 '나'는 참 외로웠다. 아니 우울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평소 스물여섯이라는 나이를 넘기면 아마도 결혼하기 힘들수도 있다는 '주문'과도 같은 엄마의 말이...나로 하여금 스물다섯에 만난 사람과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그렇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연애경험이 아주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스물 넷이 넘어가니 점점 마음이 급해져왔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스물여섯이 넘어도 얼마든지 결혼을 할 수 있었을텐데...결국 엄마덕분에(?) 우리 4남매는 모두 스물여섯이 되는 해에 결혼에 성공(?)했고, 엄마는 그런 사실을 주변에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셨었다.
스스로 전성기라 여겼던 '스물 다섯'이 되는 해에 소개팅으로 남편을 만났다. 당시에 나름 강남에서 잘나가는 과외선생이었던 나는 제법 학부모님들에게 입소문이 잘 나서 waiting list가 있을 정도였다. 아~그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너무 아쉽다. 그때는 늦은 밤 과외 마치고 친구들과 당시 hot place였던 TGIF에서 맛있는 거 먹고, 워커힐 호텔에서 만나서 차마시고, 워커힐 호텔 근처 라이브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했었는데...정말 그 시절이 너무 그립기만 하다.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경제관념이 있었더라면...지금쯤 작은 빌딩은 하나 사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에 내가 결혼해서 지방으로 갈꺼라는 소문에 후배들이 내가 하던 과외를 이어받으려고 나에게 참 잘했었는데...정말 아까웠지만 결국에는 모두 나눠줄 수 밖에 없었다는...
그렇게 시작된 나의 결혼생활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생각보다 위험요인이 참 많았던 결정이었다.허니문 베이비에, 객지에서 열달동안 입덧을 하고, 친정가는 것을 무지하게 싫어하는 시어머니 덕에 나의 신혼시절은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다. 어차피 입덧해서 남편 밥 차려주기 어려운데 왜? 친정에 못가게 했을까? 아니 그렇다고 안갔던 내가 더 문제이긴 했다. 결국 더운 여름 탈진해서 친정에서 일주일가량 쉬다 올 수는 있었지만...
첫아이를 낳고, 서울에 계신 시어머니는 매주 우리집에 오셨다. 그것도 평일에...첫아이가 아들이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천기저귀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20대에 엄마가 된 나는 남들처럼 종이기저귀가 쓰고 싶었다. 그러나 절약이 몸에 배인 시어머니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밤에는 천기저귀를 사용하면 아이가 자주 깬다는 것을 알지만...그래도 그냥 천기저귀를 사용했다. 어쩌다 집에 오시는 손님이 종이기저귀를 사오시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구입한게 아니니 사용해도 괜찮음에도 시어머니가 오신다는 연락이 오기라도 하면 그 종이기저귀를 이웃집에 잠시 맡겨두었다. 그러면서 나는 매일 천기저귀를 빨면서 점점 몸도 마음도 병들어 갔다.
어느날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왔다. 내가 거의 친구들중에 빨리 결혼한 편에 들었으므로 친구들은 아무도 결혼에 대해서 생각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우리집을 오려면 더블 요금을 줘야하는 약간은 외진 동네였고, 또 우리집에서 내가 아이 업고 빨래 너는 것을 보고, 결혼전에는 좋은 화장품만 썼던 내가 슈퍼에서 파는 '식물나라'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나를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던 그 눈빛들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당시를 떠올려지게 하는 노래, 팀 별(別)...그때 참 많이 들었었는데...갑자기 내가 너무 불쌍해지려한다. 노래와 함께 추억소환...그때의 나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조금 더 네 목소리를 내고 살아도 된단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래도 결혼생활을 유지해 온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별別(別)별(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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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 안다면 웃으며 너는 돌아올까 처음만 자유롭던 이별에 무얼 해야해 혼자남은 시간 슬픔을 둘곳없이 헤맬뿐 후회하는 내게 다시 오라하면 이기적인 날 용서해 주겠니 남은소원 나 하나라면 널 보고싶어 Wherever ever you go ever you go 내맘깊은 곳에 넌 사는걸 Ever you go ever you go 너를 사랑해 내게 준 이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