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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가가일 May 24. 2023

우울이 내게 가르쳐 준 것

한시적 단축근무를 시작한 관심직원으로 3주를 넘게 살며 느낀 점들

참 많이 좋아졌다.


불과 3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50프로로 업무를 줄이고 나니 마음의 부담이 사라져서일까 아니면 업무량도 업무의 난이도도 공식적으로 많이 낮아져서일까 울지 않은 날 보다 우는 날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로 내 상태는 드라마틱하게 좋아졌다.


하지만 중간중간 우울을 감당하지 못하는 날들도 있었다.


거짓말처럼 한 번에 좋아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팀원 모두가 함께 오랜만에 사내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미팅 겸 수다 떨기로 한 어느 날 오전,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겨우 출근해서 마음을 다잡고 팀원들 뒤를 따라 사내카페로 갔다.


커피를 주문하는데 벌써 마음이 힘들었다.


'오늘은 업무 얘기를 할 게 별로 없는데, 그리고 분위기상 노가리나 까자는 거겠지. 근데 나는 지금 수다를 떨 기분이 아닌데... 어떻게 웃으면서 독일어 수다를 귀 기울여 듣고 또 어떻게 웃으면서 장단을 맞춰야 하지? 너무... 가면을 쓰기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가가 촉촉해짐을 느꼈다. 커피를 주문하자마자


나 화장실 갔다 올게. 내 커피 나오면 같이 들고 가줄래?
먼저 마시면서 얘기 시작해

그리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호흡이 가빠오고 참아왔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말 힘든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일도 많이 줄었고 팀장의 배려로 전부서에 나에게 당분간 스폿성 업무부탁은 디렉트로 시키지 않는 걸로 소통도 되었고 어려운 개발성 업무에서도 배제되었고 덕분에 일 생각도 많이 줄고 조깅도 시작했고 잠도 푹 자고 명상도 요가도 꾸준히 하며 개인시간을 잘 보내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힘드니" 하면서 스스로에게 묻다가 또 "괜찮아 이유야 어찌 됐든 내가 힘들면 힘든 거야 울어도 괜찮아 잠깐 쉬었다 가자"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기를 반복했다. 십분 쯤 지나고서야 눈물이 그쳤고 빨개진 눈가가 서서히 원래 색을 찾을 때쯤 서둘러 팀원들이 있는 자리로 갔다.


경청하고 웃고 가끔 미러링 같은 코멘트만 하며 겨우 미팅이라 불리는 노가리 커피타임을 마쳤다.


그렇게 그저 마음이 이유 없이 힘든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우울을 인정하고 꼭 알려야 할 수밖에 없었던 팀장과 팀원 그리고 친한 동료 한둘에게 내 상태를 알리고 나서, 그리고 회사와 업무조율을 하고 나서, 업무부담을 줄이고 나서, 나의 업무 외 남는 시간에 내가 뭘 하면 좋아할까 고민하는 시간들을 갖고 그것들을 행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정말 많이 좋아지고 있다.


조깅을 하는 날들이 늘었고, 좋은 음식을 해 먹는 날 들이 늘었으며, 자기 전 환기를 하고 명상을 하고 비타민을 챙겨 먹는 좋은 습관들이 굳어졌고, 명상을 짧을지언정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려고 노력하고, 매일 나의 기분을 기록하고, 나의 생각들을 기록하고, 남편과 산책을 하고, 휴일이면 자연으로 어떻게든 가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평일에는 정원과 발코니에서 조금이라도 해를 보며 휴식을 취하려고 노력도 한다. 침대에 그저 누워서 그저 휴대폰이나 태블릿으로 유튜브 영상이나 인스타 스토리들 아니면 맞고게임 등 아무런 생각 없이 내 생각과 시간을 죽이고 싶은 열망도 아직 너무나 크고 또 그런 시간들을 하루에 한두 시간은 아직도 보내고 있지만, 내 우울을 인정하고 내 우울을 잘 보살피기로 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던 그 어느 한순간부터 나는 나를 좀 더 잘 돌보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작은 행복들이 더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영상이나 글을 찾아보며 내가 정신은 힘들지언정 몸이 건강함에 감사하는 순간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울해서 너무 힘들어서 다시 시작하게 된 기도가 며칠 새 감사기도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이는 내가 의식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우울해요 살려주세요 하나님에서 오늘 하루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우울이 아예 당장 사라지면 너무 좋겠지만, 우울 덕분에 나는 지금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내일은 모르겠지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잠깐이라도 행복할 수 있으면 참 다행이다 싶다.

몇달을 울기만 했더니 이제는 울지 않은 하루를 보내면 너무 감사하다.


오늘 울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지긋지긋한 우울이 조금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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