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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가가일 Jun 04. 2023

우울로 인한 한시적 단축근무 그 한 달 후

정말 드라마틱하게 좋아졌다 얼마나 지속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5월이 지나갔다.


5월은 정말 드라마틱한 변화의 연속이었다.


5월 첫째 주에는 우울증 3차 발병으로 인한 한 시간 단축근무를 시작하고 현타도 자존심에 상처도 많이 받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던 한 주였다. 적응기라고 부르기에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던 주.


5월 둘째 주 중반쯤 들어서부터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일에 집중도 할 수 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닐지언정 그래도 내가 할 수 있었던 업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5월 셋째 주부터는 정말 드라마틱하게 좋아졌다. 힘든 며칠도 있었지만 타 부서 직원들을 어쩌다 만나도 나름 웃으면서 인사치레 안부를 큰 문제없이 주고받을 수 있었고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심지어 내 반년 간의 50프로 단축근무에 대해 먼저 알려주며 업무시간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5월 넷째 주부터는 조증인가 싶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날씨도 한몫했고 무리하다시피 억지로 만났던 주변 친구들과의 만남도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다시 식욕이 생기고 다시 입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도 자동으로 나오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살아있어 감사합니다 날이 좋아 감사합니다 출근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홈오피스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남편과 사이가 좋아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나 많이 나아지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자동으로 되뇌는 나날들이 대부분이었다.


믿기 힘든 변화.


3주 만에 만나 뵌 상담 선생님은 내가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독일에서 와서 어학 졸업 취업 재취업 목표들을 하나하나 해치우느라 경주마로만 살아온 내가 50프로 단축근무하는 것을 역겹게 생각하지 않고 과성취를 일부러 하지 않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내가 일을 줄이며 기분이 나날이 나아지는 것을 감사해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반년 간의 단축근무가 정말 잘 한 결정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하지만 경고도 하셨다. 조금 나아졌다고 다시 단축근무 기간을 줄이거나 (사실 요 며칠 생각해보기도 했다...) 업무를 자진해서 더 받아오는 등의 일욕심을 절대 부리지 말라는 경고를 하셨다.


사실 요 며칠 컨디션이 나아지면서 나는 또 예전의 버릇 그대로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예를 들면 홈오피스하는 날 일부러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노가리를 깐다거나 그러면서 내가 한 일의 경과를 보고하며 일이 잘 되고 있고 나 일 잘하고 있다고 어필을 한다거나, 다음날 해도 되는 ad-hoc 스팟성 업무들을 굳이 바로바로 해치워준다거나, 굳이 답변 안 해도 되는 간단 이메일도 답변을 한다거나.. 어려워서 미뤄놓았던 내 상태 때문에 팀장도 시간을 더 주었던 업무를 시작한다거나...


컨디션이 좋아져서 조금만 필요이상으로 열심히 일 하고 난 날에는 확실히 한동안 없었던 회사사람들 회사일 회사에서 겪은 모든 에피소드들에 대한 되새김질, 반추를 다시 겪곤 했다.


그래서 상담선생님은 몇 번이고 경고하셨다. 절대 단축업무 기간을 줄이지도 이왕이면 연장을 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필요이상으로 열심히 하지 말라고. 단, 열심히 해도 되는 경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어서 재밌어서 일을 벌일 때는 꼭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일하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리고... 5월 한 달간 내 상태가 좋아진 것을 감안해서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2세 계획을 시작하는 것에 전문가로서 동의(?) 해 주셨다. 2017년부터 시작된 지난 6년간의 긴 상담을 통해서 내 세 번의 우울증의 여러 원인들 중 하나가 2세 계획을 커리어 때문에 미루고 미뤘던 것이라는 걸 알고 계신 선생님이시다. 단 1월부터 4월 말까지는 내 2세 계획을 아주 걱정스럽게 생각하시며 전문가로서 만류하셨는데 그 이유는 우울증 약 때문만이 아니라 (심리학 전공인 내 상담선생님과 내가 약을 처방받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모두 Escitalopram, 한국에선 렉사프로라는 제품명으로 알려진 이 항우울제가 임산부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해도 된다고 하셨다) 내 마음의 근육이 너무 약해진 상태에서 임신을 하면 우울증이 더 악화될 것을 걱정하셨기 때문이다. 


울지 않은 지난 3주가량의 시간을 뒤로하고 남편과 첫 만난 10주년을 기념한 5월 말, 상담선생님과의 상담 끝에 나는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서 10월 말까지의 50프로 단축근무 기간 내에 임신을 하는 목표로 그렇게 임신 계획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배란일, 나는 우울증 기간뿐 아니라 지난 독일에서의 8년 간의 시간 중 몇 안 되는 정말 확실에 찬 기분을 느끼게 됐다. 다시 목표가 생긴 기분, 살아갈 이유가 생긴 기분.


과연 이 기분은 진짜일까 아니면 내 회사우울증으로 부터의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임신계획을 진행하는 건 도덕적으로 내 미래아이에게 맞는 행동일까? 우울의 원인 중 하나였던 사랑하는 남편을 닮은 아이를 커리어 때문에 미루고 미뤘던 지난 3-4년의 시간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게 실체 따윈 없어 보이는 "커리어"를 위해 몇 안 되는 내 분명한 욕망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이 모든 질문들을 뒤로하고 나는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 이후 내 우울은 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아직 우울증이 정말 좋아지고 있다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무엇보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2달 반이 지난 지금이기에 지난 두 번의 우울증 경험에 비춰보아 지금 내 컨디션이 나아지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이기도 하다. 절대 약이나 상담을 중단해서는 안 되는 시기. 일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좀 나아졌다고 까불면 안 되는 시기이다. 


나는 그래도 믿고 싶다.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이번만큼은 내가 내 삶의 부족한 부분들을 잘 채워가서 절대 완벽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차피 완벽이란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이 시간을 임신, 운전, 적성 찾기 & 도전 등 내가 미뤘지만 원했던 일들을 그저 용기 있게 실행함으로써 더 이상 2주 이상 울지 않으며 살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믿어보고 싶다.


중요한 것은 내게 다시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일은 조깅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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