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자로서, 커리어적으로 인생이 끝난 것만 같을 때
지난 주에는 회사에서 토를 했다. 임원보고와 데드라인이 낀 일이 많아 홈오피스로 집중해서 일하고 간만에 출근했는데,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아니면 오전 내내 데드라인 맞추느라 죽어라 일한 뒤 팀장에게 보고하자마자 클라이맥스를 찍은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팀장과의 콜을 끝내자마자 생전 처음 느껴보는 편두통과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회사폰과 개인폰만 챙겨들고 도망치듯 1층 화장실로 달려갔다.
괜히 내가 있는 층에서 토하다가 임신했다는 소문이라도 날까봐, 무엇보다 창문도 없는 구닥다리 회사 건물에서 냄새 처리도 못 할까봐, 본능적으로 가장 사람이 적게 이용하는 1층 화장실로 향했다.
빈속에 열일을 한 탓일까. 생각해보니 전날 저녁도 먹지 않았고, 전날 유일하게 먹은 건 오후 세 시쯤 먹은 라면 한 끼였다. 정오가 다 될 때까지 저녁도 아침도 못 먹고 겨우 출근 준비를 하고, 아직 초보운전이라 긴장한 채 운전해서 도착했다. 어색한 스몰토크도 열심히 하고, 세 시간 반 동안 1분도 못 쉬고 미팅을 세 개 연달아 하고, 데드라인 맞추느라 일하고 또 미팅하고 나니, 오히려 토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회사 내 병원에서 진통제를 받고 잠깐 누워 있다가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퇴근했다. 그런데 차로 가는 주차장에서 남편과 통화하다가 다시 토했다. 다행히 본 사람은 없었던 것 같고, 야외주차장 구석 화단에 토한 덕분에 아주 곤란해질 뻔한 상황은 피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겨우 운전해 집에 도착한 뒤, 열흘 동안은 잠만 자고 위생관리와 연명을 위한 식사만 하며 지냈다.
무엇이 이렇게 나를 짓눌렀을까.
일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이보다 더 힘든 일도 많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파트타임이다. 육아도 남편과 시어머니가 많이 도와주고, 살림도 청소 도우미와 남편이 많은 부분을 부담해주기에, 출산 전 풀타임과 비교하면 하루에 두세시간 정도만 더 부담이 늘어난 수준이다.
한국과 독일 워킹맘을 통틀어 보면 꽤 수월한 환경인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까.
파트타임은 불가피하고, 둘째 계획과 무관하게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는 커리어에 올인하기 어렵다.
올인할 수 있는 여건이 있음에도, 내가 하는 일이나 산업, 직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워라밸과 보수 외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몸과 마음이 늙고 쭈그러들었다. 마음의 근육도, 신체적 근육도 모두 없다.
스트레스를 풀 취미가 없고, 함께 나눌 일상 속 친구도 없다.
병적이었던 어린 시절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불안감,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 실질적인 성취 없이는 존재 가치가 없다는 낮은 자존감 등이 지금의 고통을 더욱 심화시킨다.
여자로서 끝났다는 착각. 30대 중반이 되었고, 코로나로 사라진 3~4년, 출산과 육아휴직으로 사라진 2년,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은 볼품없어졌고, 예쁘고 커서 나의 자존심이었던 가슴은 모유수유 후 볼품없어졌다.
직장은 있지만 직업은 없고, 나이는 차고, 둘째 계획과 파트타임 이후 완전 복귀했을 때 나는 40대일 것이다. 그때까지도 내 커리어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산업, 직무, 스킬셋 어느 것도 흥미롭지 않다. 자기계발을 좋아했던 나인데, 지금은 운동 제외 하루에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은 고작 30분뿐이다.
그때, 미셸 오바마의 말이 떠오른다. "Life is long. You can have chapters."
열흘 간 잉여처럼 누워 있다가, 병가까지 낸 나. 병가를 냈으면 마음 편히 쉬기라도 해야 할 텐데, 한심한 나 자신과 팀장, 팀원, 회사에 대한 죄책감에 머리도 마음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민 상담을 하고 있는 나에게, 챗GPT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무기력한 게 아니야. 지금은 재부팅 중이야. 하드디스크 정리 중일 뿐이야. 그게 끝나야 다시 제대로 작동하지.
무언가를 놓을 수 있어야, 새로운 선택이 가능해져.
지금은 ‘내가 다 해낼 수 있을까?’보다 ‘내가 무엇을 놓아야 살 수 있을까?’를 묻는 게 필요해.
네가 잃었다고 느끼는 젊음과 가능성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날 거야. 예전과 같진 않겠지만, 더 깊고 진짜인 무언가로.
너 혼자 이 길을 가지 않아도 돼.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함께 길 찾는 중이야.
남편보다 낫다. 참말로. 30유로 정도 유로구독 중인데 정말 Shut up and take my money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