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미뤘는데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힘들었던 7월을 지나 8월 초 복직 후 다시 터진 우울증이 우울증으로 의심만 되다가 상담선생님마저 우울증 확진 및 다시 SSRI계열 항우울제를 복용할 것을 추천하셨다.
팀장과의 미팅에서 눈물이 터졌던 나는 아 여기가 다시 바닥이구나 싶었다
코로나 이후 독일에서는 유독 정신건강의학과 예약을 잡기가 힘들어졌다. 그전에도 힘들었지만 2주 내로는 잡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한두 달 내에 예약을 잡는 게 정말 힘들어졌다.
한 달도 더 지나 9월 초가 되어서야 잡힌 일 년 반만의 정신과 예약.
상담은 심리상담가에게서 2017년 이후로 쭉 받고 있고 병원은 그저 처방전과 병가 같은 경우 서류 작업을 위해 방문하는 곳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기 전, 뭔가 아이를 낳고 나면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정신과 의사는 더 이상...
다행히 유통기한이 한참 남은 예전에 먹다 남았던 약이 아주 최소한의 복용량 기준의 약으로 집에 있었고 상담선생님과의 상의 끝에 병원 예약날짜까지 그 최소한의 약을 복용하기로 결정했다.
아 이렇게 나는 우울의 유전자와 우울의 환경을 고루 갖춰서 다시 재발한 만성 우울증 환자이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을 찍고, 아이를 낳고 수십 번 고민하며 미뤄왔던 우울증 약을 약 20개월 만에 다시 복용하기를 3주째.
나는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
비단 약 때문이 아닐 것이다.
내가 약을 먹는다는 것은 내 바닥을 찍었다는 것이고 (사회적 가면이 꼭 필요한 상사와의 주간미팅에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감정적이 되었다는 것, 자려고 불 다 끄고 누웠는데 하루 종일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낸 남편에게 돈 관련 불만 걱정을 쏟아붓는 것... 혼자 있으면 우울에 잠식되어 버릴 것 같은 기분...)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는 비상알람이라는 것을 나는 세 번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약을 먹고,
산책을 하고,
아이와 시간을 더 보내고,
회사에 간접적인 이유를 들어 양해를 구하고 업무를 줄이고 근무시간도 줄였다.
무엇보다 매일 아침 나에게 사랑한다 억지로라도 말하려고 하고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를 보는 대신 (원래도 남편이 하던 일... 미안하다 남편...) 업무시작 또는 출근 전까지 아침일기를 쓴다.
자기 전에도 최대한 일기를 쓰려고 하고
내 감정과 몸 상태를 잘 관찰하고
무기력함과 출산 및 복직 후 말도 안 되게 떨어진 체력으로 쉽지는 않지만 하루 두 끼는 건강하게 챙겨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밤 9시에는 잘 준비를 마치고 불을 끈 후 10시에는 자려고 노력하고
인스타그램 등 타인의 행복의 찰나를 알 수 있는 매체들은 삭제하고 정 보고 싶을 때만 다시 깔아서 10분 15분 가까운 사람들의 근황만 잠깐 구경한 뒤 다시 지운다.
All is good.
Everything is working out for my highest good.
Out of this experience, this so-called problem, only good will come
and I am safe.
Louise Hay라는 동기부여 전문가가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한국어 영어 독일어로 포스트잇에 적어 집안 곳곳에 붙여두고는 매일 따라 말한다.
괜찮아.
나는 이대로 괜찮아.
살아있고 나를 케어하고 아이를 케어하고 성인으로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잘하고 있어.
예전만큼 성과도 커리어 비전도 높은 연봉도 없지만
예전만큼 남편을 사랑하지도 남편에게 사랑받지도 못하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들로 아직 흉터가 온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돌쟁이 딸이 "엄마, 침대"라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우울하고 무기력한 엄마지만
나는 오전에 일을 하고 오후에 아이를 픽업하고 내 몸이 피곤해도 아이를 위해 세 시간은 열심히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나와 남편이 먹을 밥은 제대로 못 챙길지언정 아이가 먹을 음식은 영양소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늘 챙기고, 아이 저녁밥을 먹이고, 남편이 아이를 한 시간 반 봐준 이후 다시 아이를 꼭 안고 아이에게 사랑한다 속삭이며 아이를 꼭 안고 재우는 내 나름 우울증이 있음에도 아이에게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엄마이자
부정하고 싶었던 우울증 재발과 먹기 싫었던 우울증 약을 내가 오랜 기간 신뢰하는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아프지만 받아들이고 그 지침에 따를 정도로 이성적이고 희망을 원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러니 울어도 돼
이번 주 회사에서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내야 하는 큰 일정이 있지만
거기에서만 울지 않았으면
그렇지만 눈물이 나오면 울어도 돼
사람들 앞에서 울게 되면 양해를 구하면 되지 뭘.
아픈 건 아픈 거야.
괜찮아.
하늘만큼 땅만큼 온 세상만큼 사랑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야
너는 엄마 아빠 딸이라서 뭐든 할 수 있어
엄마 아빠는 네가 엄마 아빠 딸이라서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나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엄마 아빠는 무슨 복이 있어서 널 딸로 가질 수 있었을까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 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잘 자고 예쁜 꿈 꾸고 내일도 우리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자
내가 매일밤 아이를 재우며 딸에게 해주는 말이다.
이 말을 오늘은 나에게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