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요리
귀찮다, 다 귀찮다.
요리를 좋아하는 서른두 살 여자에게도 키친 들어가기가 귀찮은 날이 있다. 혼자 사는 자유가 도리어 무거운 짐이 되는 날, "자기가 잘하는 그것 좀 만들어줘" 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날. 그럴 때면 상비약처럼 준비해둔 분말 소스를 팬트리에서 꺼낸다. 짜장, 하이라이스 둘 다 있는 줄 알았는데 어라 짜장은 없네.
집에 있는 양파, 버섯, 당근만으로도 그럴듯한 베지터리안 소스를 만들 수 있는데 어딘가 아쉽다. 어른이 되고서 제일 신나는 일 중 하나가 채소 하나 없이 고기만 잔뜩 들어간 하이라이스를 만들어도 잔소리들을 일 없다는 건데, 귀찮다고 이렇게 채소만 넣어 요리할 순 없지. 끄응차 일어나 자전거를 집어타고 슈퍼마켓에 간다.
고기 코너에 서서 돼지고기냐 닭고기냐를 고민한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힘들게 왔는데, 아무거나 턱 집어갈 수 없다. 그러다 삼겹살에도 눈길이 가고, 스테이크를 먹은 지도 좀 된 것 같다. 아니야, 돼지고기냐 닭고기냐. 닭고기 하자 그래, 그것도 네모 조각으로 다 잘려있는 걸로.
기름을 냄비에 두르고, 달궈지는 사이 양파와 버섯과 당근을 썬다. 닭고기부터 볶다가 겉이 노릇노릇 익어가면 채소를 모두 넣고 함께 볶는다. 마시던 물 잔에 물을 채워 냄비에 두어 번 붓는데, 치이익 하는 소리가 왠지 속 시원하다. 불을 세게 올려두고 소파에 돌아가 눕는다. 여기서는 먹을 수 없는 한국 배달음식을 사진으로 실컷 눈요기하다, 당근이 얼추 익었겠다 싶을 즈음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불을 줄이고 소스 분말을 탈탈 털어 넣자, 자작하게 끓던 닭고기 채소 물이 금세 윤기 나는 갈색의 소스로 변한다. 여기서 번뜩, 케첩이라는 치트키가 떠오른다. 한 숟갈 쭉 짜 넣으니 내가 기억하던 그 맛 나는 하이라이스 완성.
둥글넓적한 접시에 밥 한 주걱 담고 소스를 붓는다. 나는 항상 국물이 모자라, 그러니까 국물만 두어 국자 더 넣자. 숟가락은 입에 물고 뜨거운 접시는 가디건 소매를 늘려서 잡은 채 돌아온 소파에 털썩 앉는다. 마음에 드는 넷플릭스 쇼 하나를 재생한 다음에야 숟가락이 바빠진다. 긴 하루를 보낸 나의 저녁은, 서울에 있으나 암스테르담에 있으나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