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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Feb 01. 2018

24인치 캐리어에 원룸 집어넣기

미니멀 라이프와 디지털 노마드

지난 2017년 12월. 저는 '디지털 노마드로 살겠어!'라는 결심과 함께 10년 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곧 브런치와 개인 SNS 채널에 출사표를 써 올린 후 베이스캠프가 될 곳을 물색했고, 친한 친구가 먼저 내려가 터를 잡고 있던 전라남도 완도를 노마드 라이프의 기점으로 결정했는데요.


서울살이를 청산하려니 정리해야 할 것이 참 많았습니다. 먼저 5년 동안이나 맡고 있었던 축구 동호회의 감독직을 내려놓아야 했고, 친하게 지내던 이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그리고 서울의 프리랜서로서 품었던 꿈들도 잠시 미뤄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거처였습니다. 지내고 있던 원룸 오피스텔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노마드며, 완도니 하는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운명의 계시인지, 아니면 부지런히 발품을 판 덕인지 다행히 금세 다음 세입자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세입자의 입주일까지 남아 있는 시간은 약 2주 정도.


이제 오피스텔을 채우고 있는 짐만 정리한다면 꿈에도 그리던 디지털 노마드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이여 안녕

제가 지내던 곳은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풀옵션 오피스텔이었습니다. 호텔로 지어지다가 용도를 변경한 곳이라 대화면 텔레비전과 더블 사이즈 침대가 옵션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주방이며 화장실도 아주 깔끔했는데요. 


하지만 문제는 내 소유의 커다란 가구나 가전도 없고, 넓지도 않은 그 공간에 빈틈없이 무언가가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정을 시작하려면 불필요한 짐을 줄여야 했고, 모든 짐을 내다 버리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를 찾던 저는 '먹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포함한 나름의 기준을 세운 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현금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가장 먼저 가지고 있는 짐들을 내다 팔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긴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역시나 여비, 즉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짐을 줄이면서 동시에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물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옷가지

- 책

- 수집품


가장 먼저 옷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중고 거래 사이트 등에 올릴 수 있는 것은 따로 빼두고 나머지는 모두 거리의 의류수거함이 아닌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습니다. 대부분의 초록색 의류수거함이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가게에서는 기부 영수증을 발급해준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셔츠나 바지 외에도 틈틈이 모아 왔던 레플리카(축구, 농구 유니폼)나 굳이 여러 종류가 필요하지 않은 신발, 가방 등의 잡화들도 돈으로 만들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눠 처분했습니다. 역시 범주가 애매하다면 아름다운 가게로 가져갔고요.


옷가지를 정리한 다음에는 책을 정리했습니다. 무게가 꽤 나가는 친구들이라 막상 이걸 모두 들고 갈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아득해졌는데요. 다시 정신을 붙잡고 오래도록 읽을 수 있는 고전 몇 권과 핸드북 사이즈의 단행본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중고 서점으로 가져갔습니다.


치명적인 매력의 레고 미니 피규어, 저는 그래도 일찍 발을 뺐습니다.


마지막은 소유욕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수집품의 순서였습니다. 각종 축구선수 피규어와 레고, 보드게임까지. 내가 이렇게 취미와 호기심이 다양한 사람이었나 싶어 흐뭇하다가도, 떠날 생각을 하니 이 모든 것들이 부피만 차지할 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처분하니 기분도 좋고 짐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장기간 여행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두 번째 기준을 위와 같이 정한 이유는 이번 여정이 꽤나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오랜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기준에 부합하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흰 셔츠 1벌

- 운동화 한 켤레


해외여행을 포함한 지난 몇 차례의 여행을 돌이켜보면, 이런 상황 또 저런 상황에 대비해 크지도 않은 캐리어에 욱여넣었던 옷가지와 짐들이 빛 한 번 보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야말로 짐이 짐이 되어버린 것인데요.


저는 이번 여정을 준비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멋과 격식'을 갖출 수 있게 도와주는 흰 셔츠 1벌과 전천후 활약할 수 있는 운동화 한 켤레를 제외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무언가를 처분하는 데 있어 더 과감해지게 되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리고 '고향 집으로 보낼 것과 들고 갈 것'으로 짐을 나눈 뒤 모든 이삿짐 정리를 마쳤습니다. 고생도 많고 탈도 많았던 10년 간의 서울 살이가 약 48시간 만에 몇 개의 박스로 정리되었다는 사실은 조금 슬펐지만, 이제 '정말'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되어 마음이 설렜는데요.


'새로운 베이스캠프에서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며 지내야지!'


라는 각오와 함께 우체국 방문 택배를 접수하고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브라보, 미니멀 라이프

안녕하세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그로부터 두 달 뒤의 이종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과연 새로운 곳에서 디지털 노마드로서 미니멀 라이프를 잘 실천하며 살고 있을까요?


실은,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2월 초에 완도에서 새로운 집을 계약했고(무려 2년짜리!),

그 집의 한 공간에서 동네서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 데다가,

서점과 새로운 집을 꾸미기 위해 하루에도 백 번씩 이케아를 검색하는...


그러니까 지금의 저는 서울을 떠날 때의 청년과는 누가 봐도 조금 다른 사람이네요.


하지만 저는 제가 미니멀 라이프를 아주 잘 실천하며 사는 중이라 믿고 있습니다. 아직 서울에서 챙겨 온 것 외에 불필요한 옷가지는 일절 사지 않았고, 레고와 피규어도 거들떠보지 않고 있으며, 서점에 들여놓을 것들을 제외하면 책도 도서관이나 일터에서 빌려 읽고 있으니까요.


잠깐 옷가지가 걸려 있는 행거를 살피고 왔는데 흰 셔츠의 다림질 상태도 아주 훌륭합니다! 당장 꺼내 입고 소개팅에 나가도 될 정도라면 상상이 가시죠? 아, 한 가지 문제는 너무나 열심히 걷고 뛴 나머지 운동화 바닥에 구멍이 나버린 것인데요. 하지만 서울에서 챙겨 온 다른 운동화 한 켤레가 있어 아직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미니멀 라이프는 '덜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저는 미니멀 라이프의 핵심이 '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갖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디지털 노마드라는 삶의 방식과 미니멀 라이프는 아주 비슷한데요. 집이나 자동차를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벌고 싶은 만큼 일하고, 남는 시간을 활용해 자기 계발이나 여행, 여가에 투자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노마드들이 살아가는 전형적인 모습이니까요. 아직 노마드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미니멀 라이프부터 먼저 실천해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될 것 같습니다.


* 목요 위클리 매거진 '디지털 노마드 가이드북'의 다음화는 너무나도 미니멀한 베이스캠프 '완도'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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