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 115일 차
이유없이 퇴근을 미루고 싶은 밤이 있다. 이게 무슨 강아지 배부른 소리냐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퇴근을 미룬 채 '나의 왕국' 완도살롱에서 길상호 시인의 시집 '우리의 죄는 야옹'을 읽고 노트북을 켰다. 평소라면 찐한 위스키를 한 잔 온 더 락으로 만들어 마셨겠지만, 요 며칠 무리한 탓에 오늘은 홍차 주머니 한 놈을 따뜻한 물에 적셔 목을 축이고 있다.
어제 아침에는 지난 사고(자동차가 굴러와 완도살롱의 정문을 들이 받은 사건) 보험 처리의 마지막 심사가 있었다. 사고로 인해 손해를 본 가게 매출의 보상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처음에 이 사건의 마무리까지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다. 확정된 보상 비용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짜증이 나고 화가 났던 것은 보험 처리 과정에서의 번거로움과 스트레스였다.
보험 처리 과정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피해측인 우리가 밟아야 했고, 보수 공사 업체 선정, 피해에 대한 증명, 보상 비용 확정까지 무엇 하나 발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없다보니 스트레스를 받는 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들에 신경을 쏟을 수 있었던 에너지를 우리가 받은 피해를 증명하는 데 소모하다니,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보상 비용이 입금되면 맛있는 고기를 사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달래야 하겠다.
어제 낮에는 하루종일 영화 피치 퍼펙트(Pitch Perfect) 시리즈의 첫 번째 편 OST와 클립 영상을 다시 듣고 봤다. 피치 퍼펙트는 출신과 성분이 다른 대학생들이 아카펠라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하모니를 만들어 간다는 내용인데, OST를 들으면서 완도살롱의 다음 영화 상영회에서 피치 퍼펙트를 함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도살롱이 지향하는 모습과 메시지가 영화에 녹아 있다는 것을 친구들도 느끼게 된다면 더 좋고.
어제 저녁에는 요즘의 내가 참으로 비겁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분노가 치밀었다. 작가라는 호칭으로 스스로를 부르고 또 불리길 원하면서 쓰고 읽기를 게을리 한다거나, 평소의 나답지 못하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마음을 숨기고, 반복되는 일상에 안주하며 편한 것만을 찾고 있는 나란 놈의 모습 때문이었다. 당장 지금부터 더 불편하고 용감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몇 가지를 실천했다. 결과는 뭐 알아서 아름답게 흘러 가겠지.
하지만 요즘은 참 고맙고 감사한 일들도 많았다. 혼자 사는 내 생각이 났다며 맛있는 것들을 가져다 주는 분도 있었고, 게을러지지 말고 열심히 연습하라며 아껴왔던 피아노 악보책을 가져다 주는 분, 항상 좋은 읽을 거리를 챙겨 주는 사람과 멀리서 나를 보고 싶다며 찾아오겠다는 친구들까지.
음식의 맛도, 악보책도, 반가운 연락도 모두 좋았지만 가장 감동적인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문득, 나는 베푼 것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많은 것을 받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창피하고 숙연해졌다. 티나지 않게 조금씩 보답하면 되려나? 언제나 왜 먼저 하지 못했냐고 생각할 때가 가장 민망하다. 저녁에 작성한 실천 리스트에 귀엽고 착한 일 몇 가지를 더 적어 넣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