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쓰는 로마 여행기 - Nomad in Roma (1)
10년 전쯤, 로마에서 살아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의 프리랜서였는데,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거의 백수나 다름이 없었다. 홀로 서겠다며, 무언가가 되어 보이겠다며 기세등등하게 퇴사했으나 세상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지 못한 것이다. 회사 밖은 그야말로 야생이었고, 나는 그저 잘생기고 거대한 초식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야생의 적자는 생존하지만, 현실의 적자는 생존에 방해가 된다. 천만 원을 가진 사람에게 5만 원은 고작 0.5%지만, 100만 원을 가진 자가 5만 원을 쓰면 삶이 19일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나의 경우는 당연히 후자였다. 벌이는 적었고, 씀씀이는 아무리 줄여도 그보다 컸다.
시한부처럼 살아가는 중에도 술자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취해 집으로 돌아오면 수만 원이, 아니 서울에서의 남은 날들이 며칠씩 사라지고 없었다. 담배를 배워두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시는 접속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취업사이트에 로그인한 것은 계죄에 길어 봐야 열흘 정도가 남았을 때였다. 기약 없는 제안서 회신을 기다리는 것보다, 허드렛일이라도 좋으니 일자리를 얻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감각이 고장 난 초식 시한부 프리랜서는 일자리마저 재단했다. 여긴 이래서 싫고, 저긴 저래서, 거긴 그래서 싫다며… 종일 뒤졌는데도 마음에 드는 자리는 없었고, 나는 연일 뉴스에서 떠들던 대한민국의 취업난이 정말 심각한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제 분수는 모르고. 낙관론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실망한 채 노트북을 닫으려던 그때였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흥미로운 구인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로마에서 해외 취업의 꿈을 이루세요!’
낙관주의자(또는 낭만주의자)들의 좋지 못한 습관 중 하나는 위급하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꿈과 낭만을 좇는 것이다. 서울의 초식 시한부 ENFP 프리랜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삽시간에 ‘취업난이 심각한 대한민국보다는 유럽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로마로부터의 구인공고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제목만큼 매력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스냅 작가들의 온라인 마케팅 업무
- 스냅 촬영 예약을 포함한 전체 CS 업무
- 회사가 제공하는 로마 시내 아파트에 거주
- 면접은 인천 모처에서(대표의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 단, 로마행 편도 항공권은 본인이 부담할 것
내가 누구던가? 프리랜서로 데뷔하기 전 다수의 회사에서! 네이버와 페이스북을 무대로! 수년 동안! 온라인 마케터로 경력을 쌓아온 사나이 아닌가! 객관적으로 볼 것도 없이 로마 아파트의 주인공으로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윽고 기우들이 밀려왔다. 로마행 항공권은 무슨 돈으로 살 것이며, 인천에 있다는 대표의 친구와 그의 회사는 과연 신용할 수 있는지 같은. 짧은 식견에서 비롯된 편견이겠지만, 혹시라도 나쁘고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낯선 곳에 팔아치울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국 기우와 편견, 생활고에 굴복한 나는 로마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대로 웹사이트에서 로그아웃하고 만 것이다. 낭만주의자라면서 현실에 굴복하다니… 창피하게… 돌이켜보면 쓸데없이 큰 겁을 집어삼켰던 것 같다. 분명 그때껏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탓도 있었으리라.
2주,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면 10년 전 닿지 못했던 로마에 간다. 그사이 나는 프리랜서에서 사장이, 계좌를 보며 남은 날짜를 세던 청년에서 편도 항공권쯤 쿨하게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같은 곳에서 날 기다리는 로마처럼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잘생김이라던가, 낭만주의, 낙관론 같은.
그때 내가 가지 못했던 로마에는 어떤이가 갔을까. 그도 망설였을까? 아님 용감했을까? 어쩌면 아직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주 뒤, 어디에선가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르고.
왜인지 아직 가보지 못한 로마가 그립게 여겨진다.
아니 왜일까, 아직 닿지 못한 로마가 그립게 여겨지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