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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Feb 04. 2024

로마 황제와 로맨시티스트 이야기

미리 쓰는 로마 여행기 - Nomad in Roma (2)

 프란체스코 토티(Francesco Totti). ‘로마 황제’라 불리는 남자다. 2002 월드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쫄쫄이 유니폼을 입은 단발머리 더티 플레이어로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대한민국과의 16강전에서 토티는 두 장의 경고를 받아 퇴장당했다. 처음에는 팔꿈치로 김남일을 가격했고, 페널티킥을 유도하려는 속임 동작으로 연장 전반에 두 번째 카드를 수집했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던 경기에서 상대 에이스의 이탈은 대한민국에 호재로 작용했다. 연장 후반 이영표의 크로스를 안정환이 헤더 ‘골든골’로 마무리한 것이다. 이 골로 대한민국은 8강에 진출한다.

 요즘처럼 VAR이 있었으면 아마도 이탈리아쯤 더 쉽게 이겼을 것이다. 그만큼 2002년의 대한민국은 강했다. 팬들의 응원과 열기도 대단했고. 혹자는 그때를 가리켜 ‘참 살맛 났던 시절’이라 추억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서로를 부둥켜안았고,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던, 즐거운 시절이었다.


 4년 뒤,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대회 직전 크게 다쳐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1골 4어시스트를 기록한 토티는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이때 토티를 다시 보았다. 그저 거칠기만 한 선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전매특허인 원터치 패스, 양발 슈팅, 칩슛 등은 화려하면서도 정교했고, 강력했다. 이후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토티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멋이 있는 건 커리어 전체를 한 클럽에서만 보냈다는 것이다. 1976년생인 토티는 1988년부터 2017년까지 오로지 AS 로마를 위해 뛰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페레즈 회장이 매년 크리스마스에 토티의 이름과 등번호를 새긴 유니폼을 선물로 보내며 구애했음에도 응하지 않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일화다.

 토티는 로마에서 한 번의 스쿠데토(리그 우승)와 두 번의 코파 이탈리아(FA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아홉 번의 리그 준우승이 커리어 오점이라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은퇴 전까지 기량을 유지하며 팀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기량을 알 수 있다. 로마 황제라는 별명은 그에게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1988년에 태어나 2017년까지 수도권에 살았던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여주에서 20년, 서울에서 10년을 보냈다. 현 거주지인 완도에서도 어느덧 8년 차를 맞이했다. 완도에서 그는 신화 FC와 함께 한 번의 우승과 한 번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토티처럼 원클럽맨으로 남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안다. 도시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도시를 사랑하거나, 도시가 그를 사랑하는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반드시 충족해야만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완도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설령 섬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곳에서 유니폼에 이름을 새겨 보낸다면 뭐, 고민은 해보겠지만.


 한편, 축구라는 세계에서 ‘원클럽맨’이 보기 드물어진 건 자본이 유입되고부터다. 오로지 실력으로 평가하고 돈으로 보상받는 비즈니스에서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하고, 우승 가능성이 큰 팀으로 이적하는 선수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원클럽맨의 반의어로 쓰였던 저니맨(journeyman)이라는 용어도 이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은퇴 후 디렉터로 선임되며 AS 로마에서의 커리어를 연장한 토티조차 지난 2019년에 클럽을 떠나고 말았다. 미국인 구단주 제임스 팔로타와의 불화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고, 로마 팬들은 오직 돈밖에 모르는 미국인 자본주의자의 결정이라며 비난했다.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레알 마드리드가 토티를 구단 앰버서더로 지명하려 한다는 뉴스가 스페인 언론을 통해 일제히 보도되었다. 누군가의 마음에는 여전히 낭만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2017년 12월. 나는 자본주의를 등졌다. 서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아직 낭만이 내 안에 살아있을 때 무어라도 해보자는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 그로부터 100일 뒤 나는 직장인도, 프리랜서도 아닌 디렉터가 된다. 창업을 한 것이다.

 2018년 3월에 첫 문을 연 나의 클럽 완도살롱은 다음 달 21일에 6주년을 맞이한다. ‘벌써?’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 30년의 클럽 커리어를 돌아보는 토티의 마음이 이와 같으리라 상상한다. 즐거운 시절은 정말이지 화살처럼 흘러가니까.


 분명 여행기를 쓰려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축구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 말았다. 낭만 말고도 내 안에 여전히 살아서 숨을 쉬는 것들이 있는가 보다.


<커버 사진>

: AS 로마의 연고지 라이벌인 SS 라치오의 팬들이 토티의 은퇴 소식을 듣고 내건 걸개. 내용은 "평생의 적이 경의를 표한다. 잘 가라. 프란체스코 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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