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쓰는 로마 여행기 - Nomad in Roma (3)
4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는 우아한 기치가 있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겠다는 거였다. 당시 나는 긴 외로움에 지쳐 있었다. 어떠한 대화와 스킨십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조금도 우아하지 않은 외로움에.
운명을 계획하는 것도 무모한 일이었지만, 반경 500km 내에서도 찾지 못한 걸 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찾으려는 건 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스무 배는커녕 이백 배는 더 어려운 일이리라.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그것도 아주 로맨틱하고 달콤한 것들을 좋아하는 나는 이 확률 게임의 승률을 50%로 점쳤다. 만나거나, 그러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신앙적 믿음 덕분인지 지난 이탈리아에서는 정말로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는 못했으나 좋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뭐, 운명 비슷한 것들도 있긴 했지만.
한편, 지난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를 꼽을 때 나는 언제나 제노바의 이름을 댔다. 베로나, 베로나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그가 왕좌를 차지한 이유는 제노바행이 ‘우발적이고 운명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문득 지중해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카페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무작정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했다. 횡단보도 같은 정체 구간을 만날 때마다 지도를 살폈고, 멀지 않은 항구 도시 제노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콜럼버스와 바질페스토로 유명한 도시라는 건 도착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밀라노와 달리 제노바에서는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조차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도시에 머문 3일 동안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덕분에 오롯이 그리고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지중해의 석양을 보겠다며 해변에 기대어 있다가 살풋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아름다운 여성이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길다란 오렌지색 곱슬머리에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그녀는 양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크고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5분 동안 서너 번쯤 눈길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지중해를 담아 놓은 듯 푸른 그녀의 눈이 빛났다. 비포 선라이즈의 에단 호크였다면 무어라 말이라도 걸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잠시 후 어머니로 짐작되는 여성이 나타나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곧 해가 완전히 저물었고, 우리는 눈인사를 나누며 그곳을 떠났다.
제노바를 떠나 도착한 피렌체에서는 무수히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보았다. 나 또한 다시 사람들 품으로 섞여 들어갔다. 저녁마다 같은 국적의 여행자들과 시간을 보냈고, 내가 예약한 에어비앤비 스튜디오(숙소의 한가지 형태)로 그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한바탕 웃고 떠든 후에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나는 자주 제노바가 그리워졌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이탈리아를 준비하며 나는 4년 전과 다른 외로움을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고독이다. 자발적이고도 우아한, 외로움의 또 다른 이름이자, 제노바의 해변에서 남모르게 담아온 주머니 속 작은 돌멩이 하나.
나는 오늘 가보고픈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이름을 적는다. 우아한 자태로 마주할 것들을 상상하며. 그리고 다시 하나에서 둘을 지운다. 그 빈틈으로 찾아올 운명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