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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영준 Nov 15. 2020

1. 나는 방송기자였습니다.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꽤 많은 글을 썼습니다. 방송기자로서 쓰는 글은 늘 그날 뉴스에 영상과 오디오를 입혀 나가는 기사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는 글쓰기를 할 때마다 그 글이 만들어 낼 영상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취재를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 스토리를 바탕으로 쓰는 기사가 영상으로 잘 표현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모든 ‘글’에서 고려된 요소는 ‘영상’입니다. 영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글은 방송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나는 우선 단어를 어떻게 늘어놓아야 효율적으로 시청자의 마음에 그 글이 꽂힐 수 있을지 궁리했습니다. 글쓰기가 영상으로 표현되는 과정의 효율성을 고민한 것이 효율적인 설득 글쓰기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방송기자의 글쓰기는 모두 이미지로 연결됩니다. 방송뉴스는 리포트나 스트레이스 기사로 송출되는데, 기사를 쓰는 방송기자는 단지 내용만을 전달하는 단조로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사 내용에 맞춰 어떤 영상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지 계산하고 써야 하는 겁니다. 방송기자는 뉴스를 보는 시청자들이 그 기사를 듣고 어떤 감정을 일으킬지를 미리 생각해야 합니다. 방송기자의 글쓰기는 이 모든 과정을 고려하는 계산적인 활동입니다.      

필자가 기자로 일하던 초기에는 기사 속에서 기자의 판단이나 감상感想을 드러낼 수 있었고 시청자의 판단을 유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기자는 늘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기사의 크기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기사記事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내용이 그 안에 많았습니다. 그런 경우 기자는 기사 행간行間에 말로는 하지 못할 감정을 담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언론이 점차 정치에 예속되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언론은 알아서 정권의 뜻을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기자가 기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됐습니다. 방송용 리포트의 길이도 짧아졌습니다. 2분에서 1분 50초로, 1분 30초로 기사의 길이가 줄었습니다. 


데스크(취재와 편집을 관리하는 차장급 선임기자)는 취재기자에게 ‘기자의 판단’을 기사에 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방송기자가 기사를 통해 세상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데스크는 기사 속에 어떤 판단이나 비판적 감정도 담지 말라고 했지만, 기자는 어떻게든 기사 속에 자신의 주장을 담으려는 욕망을 놓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짧은 리포트 속에 ‘기자의 시선’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단어를 선택할 것인지를 늘 고민했고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정해진 짧은 분량 속에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으니 단어를 아껴 써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상황을 말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와 표현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방송기자는 같은 기사라고 하더라도 리포트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적절한 단어와 어투를 선택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실 글쓰기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기본적인 기능이지만 제대로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고지 서너 장을 메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죠. 종이 이에 펜으로 쓰기 시작한 글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것도 보통 사람에게는 굉장한 도전입니다. 사실은 한 줄의 간단한 글도 쓰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보통 사람 모두가 하는 이런 고민은 작가들도 똑같이 하고 있는 괴로운 숙제입니다. 방송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해서 매일 조금씩 글을 써 온 저도 이런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죠. 처음에는 글쓰기를 어떡하면 좀 잘할 수 있을까 생각으로 시작한 이 책이 중간쯤 집필을 마쳤을 때는 독자 여러분과 고민을 공유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펜을 들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작가로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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