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그래도 유토피아
passo sella,
이탈리아어로 'passo'란 단계 혹은 길을 의미한다.
높이 2218미터의 장엄한 산맥에 올라보자
파소셀라를 가는 길에 만난 4인 가족. 두 딸과 부부가 서로 똑같은 점퍼를 입은 모습이 인상 깊었다. 혼자 여행을 할 때 가장 가족이 그리운 순간은 아무래도 함께 여행하는 가족을 보는 때이다. 나중에 가족을 꾸리면 부모님 그리고 나의 가족들과 함께 매일을 여행처럼 살고 싶은 나에게는, 산에서 만나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은 큰 영감이 된다. 늘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나와 같은 취미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역시 사람은 사람을 보며 무언가 바라게 되고 꿈꾸게 된다.
미래의 나를 그린다고 상상하는 것처럼 완벽한 그림이 탄생할 수는 없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미래의 나를 만드는 가장 완벽한 방법
이렇게 행복한 그림을 보며 여행할 때, 지인들이 참 많이도 부러워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학연수 겸 학부 공부를 꿈꾸며 영국으로 떠났었다. 한정된 돈으로 무엇을 하면 내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세계여행을 택했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할 테고 오랜 여행은 절대 할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많은 곳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겨우 휴가를 붙이고 붙여 일주일 유럽 투어나 가겠지라고 말이다.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관광일 뿐이니까. 당시 친구들은 이미 취업을 해 사회 초년생이 되었거나 취업 준비생이었는데 졸업 후, 취업하지 않고 외국으로 나간다는 나의 결정에 다들 부러움 반 의심 반이었다. 그중 몇몇 친구들의 시기 어린 말들에 짜증이 나기도 안타깝기도 해서 썼던 글을 회상해본다.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집이 부잔가 봐, 세상만사 쉬워서 좋겠다"라는 말이 가끔은 듣기에 당황스럽다. 돈 문제가 아니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렸다. 여행비는 항상 내가 벌어 모았고 그렇기 때문에 아까운 줄 알아서 숙박과 교통을 절대적으로 아끼며 여행하는 편이다. 유럽여행 검색하면 하루에 10만원 예산 잡으라고들 하는데 나는 하루에 2만원도 안 쓰면서 맛있는 것을 먹고 편한 곳에서 자며 반짝이는 것들을 본다. 세상만사 어렵겠지만 연연하지 않는다. 세상에 쉬운 것은 없지만 그리 어렵지만도 않더라. 하지만 가끔 나는 밥을 씹는 것이 힘들다. 나는 돈이 많아서 스물다섯 먹고 아무 걱정 없이 외국 생활하는 게 아니다. 단지 크게 의미 없는 일에 목매달기엔 인생은 너무 짧으며 현재에 충실하자는 내 가치관 때문이다. "빨리 취업해서 돈을 모아서 그때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라고들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때그때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그리고 상황이 변하는데 미래의 나를 그린다고 해서 상상했던 것처럼 완벽한 그림이 탄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렇게 살려고 한다. 나는 지금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이 현재들이 모여서 미래가 되는 거지, 내 지금을 희생한다고 해서 좋은 미래가 턱하고 세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니. 여기까지 얘기하면 그럼 좋은 미래는 어떤 미래인데?라는 이슈가 또 던져지고 할 말이 많아진다. 나는 이만하고 낮술이나 마시러 갈란다. 그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니까. (2015년 돌로미티에서)
모든 사람이 행복한 날을 꿈꾼다. 사실 모든 이들은 하루를 살고 있다. 그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 굳이 여행을 도피 혹은 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항상 여행을 좋은 것, 해야만 하는 것, 여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여행도 사실 하나의 일이다. 생각보다 스트레스받는 일이고 체력도 필요하다(물론 짧은 관광이나 휴식의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하루를 여행처럼 사는 방법을 찾고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으면 한다. 빡빡한 한국 사회에서 무슨 유토피아를 찾느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하루는 우리가 결정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