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아이가 깨서 나도 잠이 깼다. 아이가 다시 잠든 후, 렌즈를 끼지 않아 흐리게 보이는 달과 밤의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흐리게 보이는 불빛들을 주시하자 그것들은 형태를 계속 바꾼다. 겨울의 눈의 결정처럼 보일 때도 있고, 하여튼 렌즈를 끼고 봤을 때처럼 한가지 모습은 아니다. (사실, 방금 봤는데도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역시 사물을 보고 주의 깊게 기억하는 습관이 부족하다.)
불빛들을 주시하며 그것을 명상 삼아 평온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저것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생각들이 떠오른다.
늘 친절하게 인사해주셨던 유치원 버스 기사님께서 하원 시간을 잘못 알고 조금 늦게 나온 나에게 퉁명스러우셨던 것.
그 생각이 떠오르자 잠시 생각했다가 다시 또 흘려보내니, 이제는 요즘은 왜 자주 오지 않냐며 나에게 서운하다 했던, 그래서 그 가게를 피해 다른 길로 다니게 했던, 반찬가게 아줌마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또 이 아줌마가 갑자기 이 새벽에 왜 떠올라 라는 생각을 하며 또 그 생각을 흘려보내니,
이제는 유치원 버스 하원 도와주시는 선생님들이 아침부터 점심, 또 늦은 오후에 애기들을 하원시키는 광경이 선생님마다 한명씩 번갈아 떠오르는 것이다.
아... 밤을 밝혀주는 흐린 불빛들을 주시했을 뿐인데, 별 시덥잖은 중요치도 않은 생각들이 줄줄줄... 연이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끼자..
아... 참 나라는 사람은 별거 없구나... 이 고요한 새벽에 떠올릴만한 거라곤, 유치원 버스 기사님의 퉁명스러운 표정, 반찬가게 아줌마의 나에 대한 서운함, 유치원 선생님들의 노고, 이런 것들만 떠오르다니..... 정말 내 머릿속이 별거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건 내가 행복해졌다는 증거인가?
내 머릿속이 누구한테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참으로 단순하다는 걸 느끼니, 독서를 더욱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과 (머릿속이 조금 더 풍부해지도록)이런 정말 별거 아닌 일상들이 나에겐 나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나보다... 라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것이다..
늘 친절했던 기사님과 가게 아줌마의 아주 미묘한 표정과 태도 변화는 문득 고요한 새벽에도 다시금 나에게 곱씹으라고 나를 다시 찾아올 정도로, 나에게는 그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반찬가게는 많고, 기사님께서 다음번엔 다시금 친절해지실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줄줄이 사탕으로 따라오는 생각 중에 실제로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나의 미래라던지, 나에게 상처를 남긴, 이제는 흉터만 남았다고 봐야 할 과거라던지, 그토록 중요한 건 이젠 곱씹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제는 과거의 아픔을 많이 소화했고, 미래의 불안감도 많이 해소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좋은 거겠지.
단순하게 살고 싶다.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민망할 정도로 단순한 일상에 단순하게 상처 받고 단순하게 곱씹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일은 유치원 기사님께서 나에게 다시금 친절하셨으면 하는 것과 반찬가게 아줌마가 이제는 나에 대해 덜 신경쓰셨으면(내가 반찬을 안 사러 가도 나에게 서운해 안 하셨으면)하는 것이다. ㅎㅎ
어렸을 때가(지금도 젊으니 젊었을 때라고 하면 안 될 것 같다) 더 복잡했던 것 같다.
나의 내면은 요동쳤고, 내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너무 많았고, 세상은 차갑고 냉혹했고, 나는 무력하고 못났다.
우리 아이들 얘기를 많이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너희들은 이제 요동치는 내면을 경험하기 시작하겠지. 그건 피할 수 없는 거야. 피한다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살아가면서 통과해야 하는, 통과해야 정상적인 그런 거야. 터널이 깜깜해서 무섭더라도 그걸 통과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 피하고 싶다 너는 이걸 안 겪었으면 좋겠다 바랄 것도 아니야.
넌 어떤 식으로든 내면의 요동을 겪을 거고,
그 과정에서 난 너가 방황하는 모습을, 너가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볼거야.
순수했던, 내가 안아만 줘도 씩 웃었던 너가 미래의 너는 아니라도,
이제는 나의 품에서 크나큰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해도, 난 나의 품으로 널 위로하려 할거야.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난 이것밖에 모르니까.
삶에서 힘든 때가 많았어. 그랬는데 사십년 살다보니 이렇게 단순해졌지. 나머지는 어느 정도 소화가 됐다는 거야. 인생에 정답이 있거나 코치가 있어서 어떻게 어떻게 대처하라고 나한테 친절하게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 과정들을 겪어온 거지.
내 방식대로 말이야.
너도 '너의 방식'대로 겪을거야.
그러니 미리 이렇게 되면 어쩌지 하고 너무 떨면서 살진 마. 넌 어떻게든 너의 방식대로 그걸 겪을거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까지도 말이야.
우린 겪을거고, 또 겪어나갈거고, 우리의 마지막 그것도 겪을거야.
좀 덜 힘들게 그걸 겪을 수 있길,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겪었던, 겪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따뜻한 눈길임을, 일상에 대한 애잔한 사랑의 마음임을, 내 인생에 대한 긍정임을,
그 힘들이 깜깜할 때도 우리를 덜 무섭게 할 것임을,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연결되길 갈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