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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켈리황 Sep 21. 2021

돈 안 쓰고 Flex

대전에 계시는 부모님 댁에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들른다. 아버지는 책 읽기를 좋아하시고, 어머니는 책보단 몸 쓰기를 좋아하셔 하루 종일 일을 하신다. 


대전에 간 어느 날 안방에 수북이 쌓인 교차로 (지역 광고 신문)가 눈에 띄었다. 거실에서 교차로를 열심히 읽으시는 아버지 모습과 함께. 아버지께 땅 사시고 싶어서 교차로를 열심히 보시냐 농담을 했더니 읽을 게 없어서 보고 계신다고 하셨다. 


아버지 하루는 아주 단순하다. 미스터 트롯 탑 6가 나오는 사랑의 콜센터를 비롯한 프로그램을 하루 종일 보시거나, 경제 TV에서 주식에 관한 정보를, 부동산 TV에서 땅이나 아파트에 대한 내용을 열심히 보신다. 매일 빼놓지 않고 동네를 걸어 다니시며 운동도 하시고,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삼시세끼 밥을 드시고는 꼭 설거지도 하신다. 


교차로를 보시는 아버지를 보며 문득 경제신문을 구독시켜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경제 신문 하나 시켜 드릴까요? 한 달에 이만 원밖에 안 해요. 제가 돈은 내드릴게요."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좋다고 하셨다. 


한국경제에 구독 신청한 지 며칠 후 신문배달소에서 전화가 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라 연세 있으신 배달하시는 분이 4층까지 배달이 어려우니, 1층 우편함에 놓으면 안 되겠냐고. 


"저희 부모님도 연세가 많으십니다. 아, 어렵네요."

 

주저하며 한참을 있으니, 그럼 오천 원을 빼주면 어떻겠냐고 한다. 일단 부모님께 여쭤보겠다고 하고, 아버지께 물으니 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만 오천 원짜리 신문구독 시작. 


다시 대전에 올 일이 있어 신문 보시는 게 어떠시냐 물으니 아버지는 웃으시고 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하루 종일 신문만 보시는 그 모습이 보기 싫으시단다. 당연히 아버지는 너무 재미있다고 하시고. 세상 사는 얘기가 다 나오고, 뉴스만 보면 모르는 회사들 사정을 속속 보는 게 그렇게 좋으시다고. 반쪽짜리 기쁨을 드렸네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추석 명절로 다시 대전에 와서 늦게까지 부모님과 TV를 봤다. 11시가 다 된 밤 나는 새로 시작한 '검은 태양'을 보고 있는데, 어머니가 책상 앞에서 뭘 하시는 게 아닌가. 


"엄마, 뭐하세요?" 

"신문 봐." 


아니 이런, 볼펜을 들고 줄을 쳐가며 열심히 신문을 읽고 계신 게 아닌가? 

평소에 눈이 아파 책 읽기를 싫어하시는 어머니가 이게 웬일인지. 


"엄마, 눈 안 아프세요? 책 읽는 거 안 좋아하시잖아요?" 

"응, 그런데 신문은 내가 읽고 싶을 걸 골라 읽을 수 있어서 재미있네." 


평소 잠을 잘 못 주무시는 어머니가 취침 전 신문을 읽고 자면 잠이 더 잘 오신다는 말과 함께. 


속으로 웃음이 한참 났다. 신문을 구독시켜드려야지 라는 작은 생각이 두 분께 이런 기쁨을 드렸구나 라는 생각에. 신문시켜드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도. 


참고로 신문 구독료는 아버지가 내고 계신다. 내 계좌에서 자동이체로 신청을 했는데, 신문배달소에서 지로용지 방법을 선택해서 구독료 청구서가 매달 신문과 함께 1층 우편함으로 배달된다. 


"아빠, 내가 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제가 내 드릴까요?" 

"뭘, 얼마 안 하는데. 내가 내도 돼." 


이럴 땐 또 말 잘 듣는 딸이 돼서, 아버지가 계속 내시도록 한다. 


"그래도 이렇게 엄마 아빠 생각하는 큰 딸 이쁘죠?" 

"그럼 말이라고 ㅎㅎ." 


부모님께 신문 구독을 시켜드린 건 최근 가장 잘 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신문을 보실 때마다 재미있으시냐고 여쭤본다. 

 

나는 돈 안 쓰고 부모님께 플렉스 (Flex)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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