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챔피언 주흔의 주먹이 마치 망치처럼 소호의 얼굴을 연이어 내리쳤다. 피와 땀이 뒤섞인 링 위에서 소호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지만, 주심은 냉정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주변에서는 관중들의 함성이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강렬한 조명 아래, 링의 땀과 피가 반짝였다.
퍼퍼퍼퍽 퍼퍼퍼퍽 퍽퍽.
주먹이 얼굴에 꽂힐 때마다 뼈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호는 이제 고통도 무감각해진 듯했다. 그의 시야는 점점 흐려졌고, 눈앞이 어지럽기 시작했다. 관중석에서 무언가 던져지는 모습도 보였지만,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주먹질에 몸이 휘청거렸고, 펀치가 멈추면 그대로 링 위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 몽롱한 상태 속에서, 문득 자신이 배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어떻게, 복싱 링에 서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주흔의 마지막 결정타가 날아왔다. 그 주먹은 천천히 느리게 보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 순간, 소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꿈에서 깨어났다.
어둑한 방 안에서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은 아직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방 안은 조용하고, 침대 옆 탁자 위의 디지털 시계가 5:3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아직도 링 위에 있는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소호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링의 긴장감과 공포가 아직도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침대 옆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며, 그는 자신이 꾼 꿈을 되새겼다. 분명 현실은 아니었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그 꿈이 그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소호는 무언의 결심을 한 듯, 이른 아침부터 주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흐 여보세요."
"나다, 소호. 아무래도 전 챔피언을 이기려면 노트가 필요할 것 같아. 너도 내가 이기기를 바라잖아. 반드시 이겨줄 테니 노트를 내게 줘."
"귀찮게 하는군. 분명히 안된다고 말했잖아."
"이번 상대는 노트 없이는 이기기 힘든 상대란 말이야!"
"그건 네가 할 일이야. 이만 끊는다."
"제발, 노트를 돌려줘."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주령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호는 분노가 몸 안에서 들끓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완벽히 보여주지 못하면 패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복사본이라도 줘."
"...좋아, 그거라면 당장이라도 가져다주지."
"그래, 그럼 바로 가져다 줘."
"그렇게 하지."
소호는 아쉬운 대로 복사본이라도 받기로 했다. 능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는 없겠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실현 가능해야 하기에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40분 후, 주령이 복사본을 가지고 와 소호에게 건네주었다. 소호는 즉각적으로 복사본을 받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내 복사본 노트에서 어떤 구절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대출금과 노후 보장의 망상, 안전한 은퇴라는 덫에 갇혀 있다. 예고 없이 정부가 당신의 연금을 써버리거나, 법률 개정으로 회사가 당신을 해고하거나, 상사가 당신의 일자리를 날려버릴 수 있다."
"그래, 이거다. 제발 생각대로 되었으면 좋겠는데..."
소호는 해당 구절을 열심히 기억하고 뇌리에 박기 위해 반복해서 외웠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왔다.
이 경기를 끝으로 소호는 다시 예전 연기자의 삶으로 돌아갈 일만 생각했다. 그렇게 상념에 잠긴 채, 그는 노트의 문구를 곱씹으며 링 안으로 들어섰다. 반대편에 있는 전 챔피언 주흔은 영상에서 보던 것과 같은 무표정으로 소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호가 관중석을 한번 둘러보자, 방송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경기는 전 챔피언의 복귀전이기에 방송국에서도 중계를 위해 나와 있었다. 경기 시작 전, 캐스터와 해설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동안 휴식기를 가진 주흔이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그가 전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은 건 단지 본인의 의지 때문입니다. 이전 경기에서 그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망주 소호가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지 기대되지만,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네, 주흔이 지난 경기에서 보여준 1라운드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그의 여유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상대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자신감의 표현이죠. 소호에게는 매우 어려운 상대가 될 겁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땡!
환호하는 관중 속에서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관중들의 함성은 점점 커졌고, 소호의 심장은 그 소리에 맞춰 더욱 빠르게 뛰었다. 그는 눈앞의 주흔을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주흔의 무표정한 얼굴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벽처럼 보였다.
소호는 주흔이 지난 경기처럼 틀림없이 맞아주고 시작할 것이라 생각하며, 초반부터 왼손 잽으로 거리를 조절한 후 오른손으로 상대의 복부를 강타했다. 별 생각 없이 있던 주흔은 상대의 펀치력을 예상하고자 가드 자세를 취했다.
퍼어억!
"크헉..."
주흔은 가드를 했음에도 복부가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어지는 소호의 연계기가 주흔에게 작렬하고 있었다.
퍼퍼퍼퍽 퍽퍽!
연계기를 맞은 주흔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1라운드 첫 다운이 나왔다. 순간 장내는 엄숙해졌고 캐스터와 해설자 모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일순간의 정적이 흐르고 장내는 크게 요동쳤다.
"아니, 말도 안 되는 공격력 보셨습니까? 여태까지 주흔은 상대의 공격을 1라운드에 맞고 쓰러진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일부러 거리를 재고 정확하게 가격했어요. 가드를 뚫고 데미지를 전달한 거예요. 저런 건 본 적이 없어요.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몸을 일으킨 주흔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파이트 자세를 취하고 심판에게 경기 재개 사인을 요청했다.
"파이트!"
심판이 경기 재개를 선언하자 소호가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폭풍처럼 공격을 재개했다. 한번 소호의 공격을 맛본 주흔은 체면이고 무표정이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능한 한 공격을 회피하며 무빙을 하고, 적절히 카운터를 넣으면서 체력 회복을 위해 시간을 버는 선택을 했다.
주흔의 변화는 눈에 띄었다. 그는 이제 소호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이전과는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이 치열한 싸움을 지켜보았다. 소호는 끊임없이 압박을 가하며 주흔을 몰아붙였다. 주흔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링 위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고, 관중들의 함성은 점점 더 커졌다. 소호는 노트의 구절을 되새기며, 이 경기를 반드시 승리로 이끌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주흔 또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이 치열한 경기는 이제 막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