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공동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요구되는 대표적인 소프트 스킬 중 하나이지만, 자격증도 없는 영역에 '기술(skill)' 이라는 표현이 덧붙는 걸 보면 결코아무나 가지고 있지않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키워드도 '소통'이다. 새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국민과의 소통'은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국민 공약 중에 하나이다. 평소에는 머리카락 한 올 구경하기 힘든 정계 인사들이 선거 시즌만 되면 우리네 삶의 현장 곳곳에 나타나 이웃 주민이라도 되는 마냥 손을 맞잡고, 부둥켜안으며 '공감'의 제스처를 보이는 것도 일시적이나마 '소통 잘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스타와 팬 간의 소통도 연예기사의 단골 소재이자, 해당 스타의 인기 수명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내가 애정하는 스타가 나의 선물이나 편지를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 감사를 전하거나, 팬들의 댓글에 일일이 코멘트를 달아주거나, 때로는 '역조공'의 형태로 스타가 직접 팬들을 위해 정성 어린 선물을 하는 등의 행보는 소통잘하는 스타에 대한 팬심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취업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직자들이 신입사원에게 요구하는 '공통 역량' 1순위는 수년 째 변함없이 '소통'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직무지식이나 기술은 시간에 비례에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지만, 소통능력은 그러기 어렵다는 것을 당사자들이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는 탓이다. (사회생활 좀 해봤다면 공감할 듯하다) 이 지점에서 신입사원의 패닉은 시작된다. 과거에 '소통 좀 해봤다'라는 학생조차도 입사와 동시에 급격하게 확장된 관계 안에서 과거 대외활동 경험으로 배운 소통 역량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동료, 상사, 타 부서 및 파트너사까지 다양한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과 '협업'하는 일은 나와 유사한 배경을 지닌 학교 내 또래집단과의 팀플 과제에 비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되는 것이다.
Q.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 노력했던 경험을 구체적으로 기술해주세요
Q. 다양한 구성원과 협력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었던 경험을 기술해 주세요.
위와 같은 자소서 문항을 들고 오는 취준생들에게 우선 이렇게 질문한다.
"소통이 뭐라고 생각해요?"
"소통을 잘한다는 게 어떤 의미 같아요?"
"주변에서 혹시 소통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있으면 왜 그렇게 느꼈어요?"
자소서 코칭을 하다 보면 조금 과장해서 10명 중 7~8명은 빠지지 않고 자신에게 '소통능력'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기업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이므로) 문제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보면 실소를 금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작성자 본인이 '대화를 시도'하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단번에 잘 해결되는' 판타지 영화급의 결론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만난 학생들이 인식하는 '소통역량'은 '잘 얘기해서 잘 해결하는 거'와 같이 세상 어려울게 없는 단순하고 만만한 역량으로 요약된다.
학생들의 불완전한 답변에 내심 불만족스러우면서도 막상 "그러면 선생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소통은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라고 물었을 때 과연 내 대답은 무엇일까를 잠시 상상해보면, 의외의 막연함에 아찔하다.
과거 내가 겪었던 다양한 사례를 복기해 가며 이 사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소통역량에 대해서 나름의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조직 생활 중 발생했던 숱한 갈등 상황에서 상대는, 나는 어떻게 행동 했으며 그렇게 했던 최종적인 결과는 뭐였었는지를 떠올리며 '소통을 잘하는건 과연 어떤걸까?'에 대해서 숙고해볼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도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납득시킬만한 꽤 효과적으로 보여지는 '소통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다음과 같이 얻었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 말이다.
쌍방향. 필수 요건이다. 상대가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은채 자기 이야기만을 일방적으로 할 때 우리는 '불통'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따라서 나의 입장이 있으면, 상대의 입장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서로의 생각을 동등한 분량과 기회로 '주고받는' 행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선경청. 상대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태도가 중요하다. "일단 내 말 먼저 들어"가 말머리가 된다면 그 대화는 시작도 전에 실패나 다름없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입장이 제일 중요하기에 이 대목에서 남다른 '인내심'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설령 상대의 이야기에 어금니가 자동으로 갈린다고 해도, 기꺼이 '먼저', '충분히' 들어주려는 제스쳐가 있어야 비로소 상대도 내 얘기를 들어줄 준비를 하게 된다. 결국 '잘 듣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내 의견을 보다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기 위함'에 궁극적인 목적을 둔다.
공감과 이해. 청력에 문제가 없다면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Sound'로서가 아닌 'context'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나와 100%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듣는 것은 고역이기에, 이역시도 상당한 수준의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큼이라도 상대가 처한 상황과 기준에서 상대의 논리를 이해해 보려 애쓴다면, 단 한뼘이라도 상호간의 의견차를 좁힐 수 있다.
상대의 언어로 대화. 지나가는 예쁜 강아지를 발견했을 때, 강아지가 놀라지 않게 강아지의 눈높이로 몸을 낮추고, 강아지가 위협감을 가지지 않도록 손바닥을 내밀어 나의 냄새를 먼저 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강형욱 훈련사를 통해 널리 알려진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강아지라는 생명체와의 신선한 소통방식이었다. 이처럼 내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면 상대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호환하여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디자이너에게는 이미지가, 건축가에게는 도면이, 변호사에게는 법이 주된 언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 나의 경험에 비춰보면 공교롭게 위의 방법들은 애당초 문제 해결 의지가 강력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과 희생' 안에서만 시작될 수 있었다. 양쪽의 입장이 한 치의 양보없이 팽팽한 긴장 상황에서는 결코 상술한 형태의 소통은 이뤄질 수 없다는 뜻이다. 특히 개개인의 실리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실세계 안에서는 누구도조금의 손해도 감수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적인 합의에 도달하는 장면을 보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며, 오히려 서로의 입장만 주장하다 결국 낯빛을 붉히며 자리를 뜨는 장면을 몇 배나 더 자주 목격한다.
이처럼 '진정한 소통'의 전제는 '인내와 양보'라는 토양 위에서만 싹을 틔울 수가 있다.
이 두가지는 불특정 다수와 얼기 설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대인에게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으로, 특정 집단 혹은 특정인에게만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만약 현재의 자신이 다른 상대 혹은 그룹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적어도 상술한 네 가지 방법 안에서 '의식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자가 점검을 해봐야 한다.
소통의 주된 목적을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어내기 위함'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일부분 양보하기 위함'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