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언니, 동생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성인이 된 후 가족의 본질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족으로 보일 수 있는 '형식'에 매몰돼 왔다. 기념일과 명절에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때가 되면 여행을 가고, 그 밖의 대소사를 앞장서 책임지고 챙기는 것만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입지를(?) 다지는 방법이자 의무라고 여겼다.
2. 지독히도 외로웠던..
기억이 나지 않는 구간을 제외한 나의 어린 시절은 결핍과 상처로 점철돼있다.
관심받고 싶을 때 관심받지 못했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받지 못했다. 주변엔 나를 진심으로 케어하고 아껴주는 어른이 없었다. 엄마는 있었지만 없었고, 아빠 역시 있었지만 없었다. 엄마에게 채무를 독촉하던 또 다른 어른인 이모 내외는 피부가 푸석하고 부종이 심한 어린 조카에게 싸늘한 눈빛만을 남겼을 뿐이다.
'나가!!!!' '버릴 거야!!' '콱! 죽어버릴 거야!!' '밥 없어, 먹지 마!!'라는 폭력적인 언사와 극한의 무기력함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나는 매일매일 버려질지 모른다는 유기 공포와 외로움에 몸서리쳐야 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때 부모님들 중에 안 그랬던 부모 없어"라는 지인의 말에 그 모든 원망에 면죄부가 씌어졌다.
'맞아..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너무 모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타고난 측은지심은 도리를 다하지 않은 부모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다. 언니는 오래전에 완전하게 등 돌렸지만 왠지 모를 '나는 그러면 안돼'라는 생각에 그 시절 한 없이 연약했던 나를 매몰차게 외면했던 어른을 향해 효도를 자처했다.
'어찌 됐던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지금은 안 그러니까... 불행 해던 과거 따위 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나의 과거사를 속속들이 아는 지인은 '나라면 절대 너같이 못해, 아니 안 해.'라고 말한다. 자신을 그토록 힘들게만 했던 부모에게 원망은커녕 효도를 한다는 사실에 고개를 내젓는다. 어쩌면 그러한 주변의 반응에 어딘가 모르게 '으쓱'해지는 기분을 즐긴 것 같다. 그저 효녀로 '비춰지는 내 모습'에 심취하고 만 것이다.
4. 너무 길고 가혹했던 시간
불우했던 시절이 파생시킨 끝 모를 낮은 자존감과 자격지심은 지금까지도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달래져 잠이드는 눈물 콧물 범벅의 어린아이와 같다. 얼마간의 시간은 벌었지만 아이는 곧 다시 깨어날 테고 또 이유 없이 떼를 쓰고 울기 시작할 게 뻔하다. 그럴 때마다 나의 성장은 멈춰버린다.
'다 지난 일'은 맞지만, '없던 일' 내지는 '그때는 아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이가 잠든 시간을 최대한 늘려가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 뿐이다.
5. 가족의 탄생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꼭 닮은 부모님 그리고 형제와 가족이 되었다. 결혼 한 번(?) 했을 뿐인데 그토록 바라 왔던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조카까지 생겼다. 친인척 어르신들까지 포함하면 하루아침에 대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얼떨떨했다. '어떻게 만든 가족인데, 잘해야지!' 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쥘 때면 남편은 자주 단호한 눈빛으로 제동을 걸었다. 가족에게 '잘하려는' 나의 의지를 지지해 줄 거라 믿었던 예상과 다른 반응에 처음에는 적잖이 놀랐다.
'남편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지 않은 걸까?'
정작 남편은 효도와 관련한 대화를 할 때면 눈시울을 자주 붉히곤 한다. 눈물 버튼이 고장 난 나와 달리 그 어떤 일에도 냉철함을 유지하던 타입이기에 부모님 이야기에 한없이 말랑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가슴이 외려 더 뜨거워졌다. 남편의 눈물에는 모든 것이 농축돼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모님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깊었다.
남편의 눈물은 오롯이 부모님을 위한 순도 100%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결혼 후 가장 크게 달라지려 노력했던 부분이 있다면 '유난스럽지 않은 관계'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가족에 대한 믿음을, 관심을, 사랑을 애써 '증명해 보이려' 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나는 한 가족의 변함없는 일원이었다. '사랑은 표현'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그 표현의 수위 조절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화분에 무작정 물만 많이 준다고 해서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6. 더 이상 상처를 줄 권리는 없어
밥먹듯이 상처를 주던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밥먹듯이 상처를 받으며 자라왔다.
평생 아물지 않을 생채기들을 가슴에 묻고, 검은 피딱지 위에 분칠을 하고 밴드를 덧붙여가면서도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는 인연을 끊어버리고, 누군가는 무심함을 방패 삼아 자신을 지킬 때에도 나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만들어진 상처를 마치 '운나쁘게' 떠돌이 개에 물려 생긴 상처로 둔갑시키기 위해 발악하고 또 발악했다. 왜? 그래도 자식이니까. 그래도 나를 버린 건 아니니까. 그래도 자식 된 도리는 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 생각이 지금은 바뀌었다. 부모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어른에게 자식 된 도리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 탓이 아니다. 내 탓이 아니다.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사람이 더 이상 가족 일리 없다.
상대가 누가 됐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또 상처를 준다면 그 관계는 그 즉시 멈춰야 한다.
흰 머리, 주름진 손, 굽은 어깨에 더이상 현혹돼서는 안된다.
머지 않은 미래의 나는 흰머리, 주름진 손, 굽은 어깨와 더불어 가슴에 커다란 멍까지 짊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