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그런 사람이야
'저 사람은 원래 저렇게 표현이 거칠어', '내가 원래 눈치가 없어서 실수를 잘해', '우리는 원래 이런 거 중요하게 생각 안 해', '저 사람은 원래 사람들 잘 챙겨'와 같이 살면서 참 많이 쓰기도 또 듣기도 하는 말인데요,
솔직히 정말 무책임하고 또 어떨 때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표현인 것 같아요.
'원래'라는 말은 '처음부터'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자타공인 '난 처음부터 이랬어'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 시작을 언제로 규정하고 있는 걸까요? 태어날 때부터? 아니면 어떤 특정 계기부터?
아무튼 이 두 음절을 방패로 어떤 사람들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또 자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는 타인의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다른 말로, 문제 상황에서 '잘못된 것은 알지만 바로잡을 계획 따위는 없으니, 네가 이해하든가 아니면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야' 내지는 '너는 원래 착하니까 네가 감수해'라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인간관계에 있어 일종의 '갑질'인 거죠.
스스로는 천년 묵은 고목처럼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미동도 않으면서, 자신을 둘러싼 타인이 '잘못된'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순응해주기를 요구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로 인한 부정적인 파급효과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제가 가장 화가 날 때는 '원래 나쁜 사람이니까 네가 이해해'라는 말을 들을 때에요. 심지어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 인한 피해사실을 공개해봐야 '너만 손해'라는 인식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거죠. 그 말도 사실은 피해자를 궁지에 몰아넣는 엄연한 언어폭력이에요. 피해 사실에 떳떳하려고 할수록 어느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목도가 기가 막히게 뒤바뀌는 사태까지도 자주 일어나니까요.
성악설에 근거해 태어날 때부터 '악한' 데다, 그 어떠한 사회화 과정을 밟지 못하고 자랐을 확률까지 고려한다면 '본디 나쁜 사람'의 존재까지는 수긍할게요. 하지만 '이해하라'는 것은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조언인지 모르겠어요. 저도 엄연히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그런데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으며', '타인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나쁜 행위에 대해서 '너그러이 받아들이라'는 건 불교로 따지면 '출가' 이후에나 가능할법한 이야기 아닌가요?
'원래'라는 말은 그만큼 나쁜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고, 착한 사람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는 나쁜 말인 것 같아요.
나 원래 연락을 잘 안 해
이 말은 구체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공들여 쌓아 온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참 인색한 표현인 것 같아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아닌 이상 사회에서 맺어진 관계에서 '무조건의 원칙'은 적용되기 어렵잖아요.
그만큼 상호 간의 주고받는 에너지 균형 즉,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해요.
노력이라고 해봐야 거창할 게 있나요. 그저 '서로에 대한 소소한 관심'을 연락으로 가끔 표현해주는 정도예요.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아주 가끔이라도 상대를 생각해 주는 거. 그리고 생각이 났을 때 가볍게 문자나 전화 한 통 하는 거. 이런 거 아닌가요? 투입시간이라고 해봐야 몇 분 내외면 충분하죠.
그런데 '나는 원래 연락을 잘 안 해'라는 건,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야'라는 이미 맺어진 관계에 대한 세상 무책임한 말인 것 같아요. 특히 관계 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가 상처가 되기 쉽죠.
과거에는 이런 말을 하는 상대라도'내가 하면 되지'라는 좋은 마음으로 연락을 했는데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혼자만 관계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워지더군요. 상대를 비난하려는 생각은 없어요.
다만 나에게 에너지를 쓸 계획이 없는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공을 들이는 내가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야말로 짝사랑인거죠.
그때 알았어요. 사람마다 관계를 맺는 온도가 다르다는 걸요.
그래서 말인데요,
당신의 관계의 온도가 100도씨라면 굳이 80도 이하의 터무니없이 낮은 온도를 지닌 상대에게 진심을 전하고자 애쓰지 말아요. 특히 그렇게 당신이 따뜻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나는 원래 30도씨까지야'라고 이야기하며 선을 긋는다면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괜한 의미부여나 시간 낭비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선택은 2가지 아니겠어요? 상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내 마음의 온도를 급격히 낮추거나(사실 거의 불가능하죠.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게 도무지 성에 안차면 그런 상대와는 관계를 끊는 게 맞겠죠. 절교에 익숙해지세요~
이미 우리 주변에는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반가워하고, 나의 안부가 궁금해 기꺼이 먼저 연락을 해 올 사람들로 충분히 넘쳐나니까요.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