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언니는 진짜 사회생활 못해"
"어. 인정"
'도대체.. 난 왜 이렇게 생겨먹어서는..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자초하는 걸까?'
스스로를 탓하고, 탓할 뿐이었다.
사교성과 사회성을 동일한 개념으로 호환하곤 하지만
'사교성'은 '상대의 감정과 무관한 일방적인 친교 행위'로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성과는 사실상 무관한 개념이다
따라서, 사교성 부족이 사회성 부족으로 연결되는 관념 또한 불성립하며,
공동체 생활에서 '스스로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오히려 타인의 입장이나 감정을 예민하게 캐치한다는 것'으로 '사회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최근 몇 년 중에 들었던 말 중 가장 쇼킹한 말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것의 근간을 흔드는 정의였음에도 단번에 격하게 공감이 되는 아이러니는 무엇?
그렇다면 나는 나의 사회성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학창 시절에는 사교성은 높았지만 사회성은 낮았다.
상대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오롯이 내 감정에만 충실한 상태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는 입바른 소리를 하고, 동료들이 다 참석하는 회식도 공개적으로 꺼리는 등 타인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학창 시절과는 다른 의미에서 또 사회성이 낮은 사람이었다. (제길.. 아니길 바랬는데..)
달라진 점은 사교성도 덩다라 낮아졌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흥미가 급격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은 지금은 만나는 사람과만 만나고, 굳이 새로운 관계를 만드려고 하지 않고, 어쩌다 알게 된 사람과도 쉽게 관계가 진전되지 않는 사교성 제로에 가깝지만 반대로 사회성 지수는 그만큼 높아졌다.
불타는 정의감이라고 할지언정 타인이 나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예전만큼 편하지 않다.
결국 사교성과 사회성은 한 사람의 에너지 수준과 밀접해 보인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니 예민해진 몸과 마음만큼 타인의 감정에 민감해지고,
반대로 에너지가 들어가야 하는 일에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이다.
남편은 오히려 내가 '남 눈치를 너무 많이 본다'며 핀잔을 줄 때가 많다.
오해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조차 상대가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까 봐'를 걱정하고
반대로 상대의 사소한 언행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를 하며 괴로워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이가 들면 다 그래'라고 치부하기에는
주변 지인들 중에 내가 유독 민감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너 텐션 진짜 많이 떨어졌다
(이 정도면 어디 아픈 거 아닌가..)
반가운 마음이 크기에 한 달음에 달려왔음에도, 그런 감정이 이전만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나조차도 당황스럽다. (몇 년 전만 됐어도 도로에서 고공 점프를 뛰며 호들갑을 떨었을 거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그랬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격하게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