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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Nov 04. 2021

자리양보 함부로 하지 마세요

모르는 타인에 관한 호칭 재정리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함부로 자리 양보를 하지 않는다.

나이 먹을 만큼 먹어서 '버릇없다'는 평을 들어도 할 말 없다.


방점은 '함부로'에 있다.

내 기준에서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보하는 제스처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상당한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 봐도 지팡이를 짚는 등 거동이 불편하거나, 짐이 너무 많거나 혹은 초등학생 미만의 어린아이처럼 손잡이를 잡기에 턱없이 왜소한 경우는 예외다. 이런 때는 상대의 외모가 아닌 단순히 처해있는 '곤란한 상황'으로만 오해의 여지없이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앞서 열거한 사례에는 해당되지 않으나 모른 척 앉아있자니 가시방석일 정도로 상당히 '연로'해 보이는 대상이라고 판단되면 곧 내릴 것처럼 조용히 일어선다.  물론 그런 때조차도  "여기에 앉으세요"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누가 앉아야 할지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후이기에 애먼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는 없다.  


이런 부분에 꽤 민감하게 된 데에는 엄마의 영향이 크다.

어느 날 엄마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버스를 탔는데,, 50대로 보이는 사람이 나한테 '어르신, 여기 앉으세요' 하면서 자리를 양보하는데..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그랬어..


하루하루 늘어가는 주름과 흰머리를 보면 한창 젊은 나도 한 번씩 서글픈 마음이 들 지언대,

60 중반의 엄마 심경은 오죽할까 싶다. 게다가 자리를 양보한 상대가 50대라닛!!!


당신이 '어르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인다는 사실에 엄마는 꽤 허탈해했다.

엄마 나이에도 '어르신'은 적어도 백발이 성성한 80대 이상의 '노인'을 의미했다.

그렇게 불리기에는 엄마는 여전히 '예쁘다'는 말에 함박웃음을 짓는 청춘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의 사소한 언행 때문에 엄마는 몇 날 며칠을 거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돌이킬 수 없는 젊음을 아쉬워했다.

낯선 타인의 '공경의 호칭'이 정작 상대에게는 의도치 않게도 마음의 생채기를 남겼다.




결은 조금 달라도 타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호칭으로 불편했던 경험이 또 있다.  


대표적으로 쇼핑몰에서 엄마에게 무턱대고 '어머니' 혹은 '엄마'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경우가 그렇다.  

"엄마, 이거 사~ 엄마한테는 이게 딱이야"라고 실제 딸인 나보다 더 거침없이 엄마를 부르며 심지어 반말로 응대하는 매장 점원의 호칭과 태도가 불편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분의 호칭대로라면 나는 매장에 '손님'으로 입장했는데 느닷없이 '자매'를 만난 셈이다.


한국인으로 이런 상황에 한두 번 노출됐던 것이 아니기에 '그러려니~'하며 지나온 세월만 십수 년이지만

아무리 겪어도 적응되지 않던 어느 날 엄마에게 진지하게 본심을 물은 적이 있다.


"남들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거 괜찮아?"


"그럴 리가 있냐, 내가 왜 자기들 엄마야?"


곧잘 맞장구까지 쳐가며 잘 받아주는 엄마의 모습에  어른들은 확실히 저렇게 격 없이 다가오는 것을 좋아하는가 보다 싶었는데,  정작 엄마도 그런 호칭이 영 듣기 거북하지만 '그러려니~'라는 마음으로 받아준 것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장년층 고객 호칭에 관한 상당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다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니 크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뿐인걸까.




내 경우도 있다.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었던 고3 수험생 시절이었는데,  10살 어린 동생 손을 잡고 길을 가던 나를 향해

뒤에서 누군가가 "애기 엄마!"라고 부르는게 아닌가!

공부는 물론 외모에도 한창 예민하던 시기였던 터라 그 호칭은 일종의 묻지 마 폭력과도 같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살집이 있고, 아이와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애기 엄마'로 불릴 수 있는 믿도 끝도 없는 근거가 된 거였다.


때문에 잘 아는 관계가 아니라면 낯선 타인에 대한 호칭에는 아무런 판단요소가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살기에는 한 사람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내 경우처럼) 엉뚱한 상처로 기억될 만큼 영향력이 오래갈 수도 있다.


매장 이용객은 '고객님',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민원인', 교통수단에 탑승한 사람에게는 '승객'처럼

왜곡된 시각을 걷어내면 낯선 상대와 나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담백한 표현은 얼마든지 있다.

설령 길에서 앞에 걸어가던 사람이 걸치고 있던 목도리를 떨어뜨렸다고 해도, 상대의 외관만으로 "어르신, 야, 아줌마, 아저씨, 학생, 아가씨, 총각, 애기 엄마"과 같이 부르는 것이 아닌  "저기요~" 내지는 "잠깐만요" 정도로 상대를 함부로 정의하지 않고도 멈춰 세울 수 있는 방법은 조금만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찾을 수 있다.


요즘에는 미모가 출중한 사람에게 건네는 '예쁘다, 날씬하다'는 말조차도 칭찬이 아닌 실례가 될 수 있을 만큼 타인의 겉모습에 대한 일체의 평가를 하지 않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기에 더더욱 이러한 편협한 호칭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제는 상처 받은 엄마를 다독여야 한다.


엄마,  
엄마가 50대로 본 그 사람 아마도 30대일 거야.
엄마도 그 사람 나이 들게 본거야.  그런 면에서 엄마도 그분한테 맘속으로 실수했지 뭐. 안 그래?  
만약 진짜 30대라면 엄마가 어르신으로 보일 수도 있지. 그렇지?"

엄마는 큰 위안이 됐다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했다.


휴...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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