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도 모른 죄
독고애라가 처음부터 마케터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기 취업에 가까웠다.
"연봉은 2,600만 원입니다."
개 미친. 대박.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애라는 없어 보이지 않기 위해 입꼬리를 필사로 눌렀다. 애라는 원래 예능 PD를 지망하던 언론고시생이었다. 외주 제작사에서 일하나 방송국 파견직으로 일하나 그녀의 월급은 늘 120만 원 언저리였다. 공중파 3사 초봉의 맛은 정규직 공채의 벽을 넘은 극히 소수에게나 배당된다. 애라는 최종 면접에서 자주 고배를 마셨는데, 그럴 때면 이제 진짜 시험은 끝이라며 다시 120만 원짜리 FD 자리로 달려갔다. 열에 아홉은 얌전히 시험이나 보라고 쫓겨났지만...박봉과 불안의 4년이었다.
근데 여긴 무려 정규직에
2600 나누기 12는 대충 해도 월 200이 넘잖아?
스타트업 '김즈'의 면접은 언론고시 카페에 '콘텐츠 스페셜리스트' 채용 공고가 올라온 걸 보고 별생각 없이 간 자리였다. 당시 애라는 여태 PD에 미련을 못 버리고 계약직 조연출 면접을 왕창 보러 다니고 있었다. 아직 자아가 넘치는 청년 백수 애라에게 스타트업 '김즈'는 지원 횟수를 늘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이 지원한 327번째 회사 정도였다. 사실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도 소식이 끊긴 대학 선배를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다. 야반도주하듯이 학교를 떠난 그가 창업 동아리에서 대회를 나갔다가 스타트업을 차리게 되었다고 번들거리는 왁스를 머리에 칠한 채 기사에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저희 '김즈'는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일찍 많이 일한다는 정신으로 오전 여덟 시 반에 출근해서 오후 여섯 시 반에 퇴근하고 있어요."
인사 담당자는 애라의 눈치를 보며 조금 멋쩍은 듯이 말했다. 타사보다 이른 여덟 시 반 출근은 스타트업 '김즈'의 채용을 어렵게 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라는 새벽부터 예민한 PD의 차를 타고 촬영을 나갔다가, 귀에 피가 나게 욕먹고 달빛 아래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다. ‘김즈’의 워라밸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저희 앱에는 수 천 개 분야의 콘텐츠들이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어요. 어떻게 비유하면 이해하시기 편할까? 편집기자 아시죠? 저희는 애라 님이 편집장처럼 그때그때 우리 '김즈' 앱에 있는 수많은 콘텐츠를 카테고리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하고 관리하는 그런 역할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원색의 스타킹을 신고 면접장에 들어온 김 이사는 애라에게 더없이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애라는 그녀의 폭탄 머리 파마가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기꺼웠다. 무려 반말, 코웃음, 내려치기 화법이 없는 만점짜리 면접장이 아닌가. 몇 시간 전 애라의 마음을 천 갈래로 찢은 '애니멀 랜드' 조연출 면접과 비교하자면 선녀 그 자체였다. ‘이곳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곳이구나. 소중한 내 노동력을 받을 자격이 있다.’ 금사빠 애라는 꿈을 접고 다음 날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근데 저 콘텐츠 스페셜리스트로 뽑힌 거 아닌가요?"
다만, 마케팅 매니저라고 쓰여 있는 계약서를 보고 의아해진 애라가 작게 물었다.
"아아 저희가 콘텐츠 팀, 커뮤니티 팀, 바이럴 팀이 나누어져 있긴 한데 모두 마케팅 매니저라고 통일해서 부르고 있어요."
케이블 채널에서 편집 아르바이트를 뛰던 시절, 사무실의 깍두기였던 애라의 자리는 마케팅팀 한가운데였다. 애라의 눈칫밥에 의하면 마케터들의 하루는 엑셀과 엑셀, 짜증, 그리고 또 엑셀의 연속으로 보였다. 확실한 건 삶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그러니까 가여운 동갑내기 계약직 애라의 책상에 번번이 자신들의 명품백을 올려놓는 못된 짓을 했겠지. 애라는 마케터가 싫었다. 영원히 내 일 아니고 남의 일임. 난 그런 핵노잼이 되고 싶지 않음.
그랬는데
이 몸이 그런 마케터의 일을 한다고?
신은 왜 내가 싫다는 것만 이뤄주지?
"지금부터 페르소나 아이디를 원하는 만큼 만드시면 되어요."
물론 '그런 마케터의 일'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행운과 노오력이 필요한지, 애라는 내일 깨닫게 된다.
독고애라, 관심사 AI based Global Community K-SNS 앱 '김즈'에 합류하다. 늘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그녀.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