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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Oct 21. 2020

#2 첫 출근부터 회사의 비밀을 들어버렸다.

뭣도 모른 죄

애라가 신입사원 온보딩을 받는 유리 벽의 방 안에는 빨간 뿔테 안경을 쓴 자그마한 동기가 함께였다. '김즈'의 업무 공간은 소통에 환장한 스타트업답게 전부 칸막이가 없었다. 한눈에 사무실 전체가 보이는 데다 회의실의 모든 문이 투명했다. 이 정도면 앉은자리에서 누가 무얼 하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라는 눈알을 굴리며 유리 벽 너머 사무실의 행복도를 체크했다. 문 앞에 착석한 디자이너 두 명이 서로를 퍽퍽 때리고 있었다. 음. 행복한 건가.


그래서 페르소나란 무엇인가.


영어와 상식이 짧은 애라에게 페르소나는 영화감독들의 최애 배우 정도의 의미였다. 영화에서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찰떡같이 연기해줄 배우.


"어드민 페이지에 들어가면 멤버 별로 어떤 페르소나 아이디를 쓰고 있는지 보실 수 있어요. 각자 이름 밑에 리스트가 있죠?"


흡사 부처의 얼굴을 하고 평온하게 인수인계를 진행 중인 김하나는 '김즈'의 초기 멤버다. 아직 어린 얼굴을 하고도, 세상 희로애락에 흥미를 잃은 듯한 그녀의 태도가 애라에겐 되레 안정감을 주었다. 그래서 애라는 김하나가 사실은 폭탄 같은 기밀을 조곤조곤 늘어놓고 있다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마케팅팀은 페르소나 아이디를 가장 많이 만들기 때문에 구글 시트에 따로 페르소나 아이디 설정 정보를 정리하고 있어요."

"네? 아이디를 만들어요? 조작하는 건가요??"


김하나는 회사의 일급비밀을 오픈하는 것치고는 무던한 목소리였다. 토끼 눈이 된 애라 앞에 그녀는 의젓하게 80개가 넘는 자신의 페르소나 아이디 목록을 펼쳤다. '김즈'는 커뮤니티 앱 서비스다. 수익 모델은 아직 0. 대표 김영화는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김즈’에 유저를 모으고, 모인 유저로 플랫폼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지난 2년간의 노력으로 이미 꽤 많은 유저가 '김즈'에 있긴 했다. 여느 커뮤니티처럼 '김즈'의 유저들은 '김즈' 앱 안에서 열심히 콘텐츠를 올리고 댓글을 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이기 위해 '김즈'의 임직원들이 다량의 가상 인격들을 가지고 수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IT업계에서 꽤 높은 개발력으로 인정받는 이 회사의 이면이다. 댓글 알바야 뭐야... 신입사원 독고애라는 아직 이런 비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동조를 얻으려 슬쩍 곁눈질하니 동기 김지경은 태평했다. 아니 오히려 안경 뒤에 희열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스타트업에서 서비스를 만드는 제군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앱을 쓰고 즐기는 분위기는 상서로운 징조다. 하지만 '김즈' 임직원 페르소나 리스트에서 80% 이상의 지분율을 차지하고 있는 마케팅팀은 뭐랄까 좀 과하다. 그들의 활동은 우리 앱을 단순히 즐기고 사랑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비장하고 비자발적이고 은밀하며 때로는 커피값이 벌금으로 걸려 있는 기계적인 로동이다. 결정적으로 사기 아니야? 하고 의로운 애라는 생각했다.

   

"두 분은 앞으로 어떤 페르소나 설정으로 어떤 주제의 콘텐츠를 만들고, 어떤 말투로 유저들과 소통할지, 각각 페르소나 10개씩 기획안을 써주세요."


문득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조롱당하던 '다중이'가 떠올랐다. 아이디 수십 개를 가지고 자기 글에 댓글을 달다가 IP가 공개되는 바람에 패가망신하지 않았던가. 결코 인터넷에 글을 쓰지 않는 오프라인 인간 애라는 그들이 한심했다. 저런다 진짜 자아는 잃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다가 막 정신 분열 오고 그러면 어떡해요?"


건강 염려증이 있는 애라의 질문에 옆에 있던 김지경은 기가 찼다. 도라이네. 퇴근하면 네이트 판에 회사에 미친 동기가 있다는 제목으로 글이나 써야겠다.


"커뮤니티 빌딩 업무가 힘들 때도 있는데 '김즈' 앱 덕분에 하루의 낙이 생겼다는 유저들의 후기를 보면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파이팅입니다."  


환멸을 느끼는 김지경과 달리 이미 산전수전을  겪은 김하나는 애라의 오바쌈바를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숙하게 처리했다. 오늘 들은  그럼  비밀이냐는 애라의 또라이 같은 질문에도 김하나는 다정했다.

 

"저희가 진행하는 커뮤니티 빌딩 방법에 대한 연구 자료나 이론은 조금만 찾아보시면 해외에 많이 있답니다. 물론 저희 팀이 하는 업무를 세세하게 밖에 말하고 다닐 필요는 없겠죠?"


애라는 철이 없을 뿐 눈치가 꽤 빠르다.

김하나가 아무리 돌려 말해도 진위를 정확히 파악한다.


도망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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