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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Oct 22. 2020

#3 "무슨 콘텐츠 공장이 된 기분이에요."

뭣도 모른 죄

불행인지 다행인지 애라는 전형적인 ENFP 인간이다. 단순하기 때문에 절망도 빠르고 극복도 빠르고 기분 전환도 빠르다는 얘기다.


"이거 은근히 재미있는 것 같아요."


뭐래… 못 하겠다고 유난 떨더니 김하나가 회의실을 나가자마자 금세 자신의 부캐 만들기에 집중한 애라를 동기 김지경은 마뜩잖게 쳐다보았다. 애라는 이미 빛의 속도로 아이디 20개 생성을 마치고, 구글 시트에 부캐들의 서사를 타이핑 중이었다.


"'알파카'는 케이팝 아이돌 카테고리에 쓸 아이디고요. 친구가 이번에 하얀색 차를 사서, 그 차 이름이 알파'카'거든요. 거기서 따왔어요!"


너무 안 궁금한데. 라고 김지경은 안경을 올리며 생각했다. 시력이 나쁜 김지경은 보안 문자 입력부터 자꾸 틀리는 바람에 가입 문턱도 못 가는 중이다. 옆에서 현란하게 아이디를 만들며 라섹은 인생 수술이니 꼭 하라고 떠드는 애라가 거슬릴 만도 했다.


"알파카는 초등학생 때부터 엄청난 아이돌 팬인데요. 지금은 탈덕한 척하고 있지만, 퇴근 후 '김즈' 앱에서 랜선 덕질 중이에요. 여성이고 나이는 25세. 올해 목표는 중국어 자격증 따기. 왜냐하면 중국 배우 덕질도 하니까요. 그거 아세요? 중국 드라마는 막 60회씩 해요. 너무 많아서 보기 힘들다요…


그리고 힙래빗 얘는 힙합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여친이 토끼를 닮아서 힙래빗이라고 만들어봤어요. 29세 남성이고 '김즈' 힙합 카테고리에서 힙합 프로그램 리뷰를 허세 가득하게 쓸 거예요. 근데 힙래빗은 요새 을의 연애 중이라 연애 카테고리에서 고민 글도 잘 올려요."


얘 정말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김지경은 애라가 많이 질리는 스타일이라 생각하며 헤드셋을 조용히 꼈다. 다행히 애라의 즐거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TOP 7 (탑세븐) 때문이었다.


TOP 7 (탑세븐)은 또 무엇인가.


포털 사이트 대문에 메인 뉴스들이 잘 배치되어 있듯이, '김즈'도 앱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이 TOP 7 (탑세븐) 섹션이 뜨게 되어 있다. '김즈'의 TOP 7은 철저하게 인간이 수동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마케팅팀 멤버라면 누구나 당번을 정해서 시간대별로 자신이 담당한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예약해두어야 한다. 회사는 매달 누가 얼마나 잘 팔리는 콘텐츠를, 잘 팔리는 제목으로 TOP 7에 걸었는지 각 콘텐츠의 CTR (클릭률)을 줄 세워서 공개했다.


TOP 7은 '김즈'를 대표하는 얼굴과도 같으며 '김즈'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김 이사는 언젠가 그 공간이 한 칸당 광고비 3,000만 원쯤은 족히 받는 가치로 떡상할 것이라 믿었다. 해서 TOP 7에 올라가는 콘텐츠들에 대해 특별히 예민하다. 감히 자격 없는 콘텐츠가 TOP7에 노출될 경우, 그녀는 내면의 가장 거친 본성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한날한시에 입사한 애라와 김지경의 희비를 갈랐다.


김지경이 맡은 패션, 인테리어 카테고리는 '김즈' 안에서 전통적으로 인기 있는 주제였다. 가만히 있어도 많은 유저가 자발적으로 양질의 글을 썼고, 댓글도 활발히 달렸다. 반면 애라가 맡은 한국 드라마나 케이팝 아이돌, 연예 소식 등은 '김즈' 앱에서 가장 인기 없는 카테고리였다. 연예인 이야기를 할 공간은 이미 지천으로 널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굳이 '김즈' 앱에서 아이돌이나 드라마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기도 했거니와 ‘김즈’ 초기 멤버들이 TV를 전혀 안 보는 탓도 있었다. 오래 방치되었지만 ‘김즈’의 궁극적인 성공을 위해 키워야 하는 노다지. 애라는 흡사 곡괭이도 없이 손으로 삽질을 하는 것이다.


앱에 올라오는 글이 없으니 TOP 7 당번 차례가 올 때마다 애라는 고독하게 콘텐츠를 쥐어 짜내야 했기 때문이다. 첫날 신나게 만든 페르소나 아이디들은 하도 돌려써서 늘 부족했다. 게다가 김 이사가 TOP 7에 올라가는 글은 무조건 댓글이 30개 이상 달려있어야 한다고 엄포를 내리지 않았던가. 이미 댓글 3개짜리 글을 TOP 7에 올렸다가 김이사 손에 한 번 죽을 뻔한 애라는 목숨을 걸고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며 자신이 쓴 글에 'ㅋㅋㅋㅋㅋㅋㅋㅋ', '존잘ㅇㅈ', '작성자 개웃겨' 등의 댓글을 달았다. 하루 최소 세 번 마감의 연속. 유저들이 쓴 콘텐츠를 몇 분 만에 예약만 하면 되는 김지경과 달리 애라는 하루하루가 위기였다.

   

TOP 7 교체 시간이 되었는데 담당자가  콘텐츠를 예약하지 않으면 너무도 티나게 TOP 7   칸만  비게 된다. 선례는 없으나 모두가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 날이 오면 김이사가 곰이 되어 사람을 찢을 수도 있다고. 살고 싶은 애라는 매일 필사적으로 영상을 퍼오고, 움짤을 찌고, 글을 썼다. 어느새 50개로 늘어난 페르소나들과 함께 50 다중이가 되어 댓글을 달았다.


"무슨 콘텐츠 공장이 된 기분이에요."


김지경에게 패션 카테고리를 넘긴 덕분에 TOP 7 당번 노동에서 제외된 초기 멤버 김삼식을 붙들고 애라가 말했다.


"저도 이거 졸업하고 싶어요. 비결 좀 알려주세요."


그는 스티브 잡스의 까만 목티를 열 개쯤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단벌 신사였지만 놀랍게도 '김즈' 남성 패션 카테고리 부흥을 이끈 장본인이라 했다.


"저는 2년 했어요."


그리고 꼰대다. 결코 나는 저 꼰대처럼 이 잡일을 2년씩 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던 애라에게 다정한 댓글 알림이 왔다.


'갈보X'


“이야. 우리 앱에는 이런 예스러운 상욕을 구사하는 유저도 계시고 정말 대단한걸. 고소해야지.”


말만 그렇지 고소 pdf 따는 법도 모르는 애라는 모니터 뒤에 있을 악플러에게 가운데 손가락이나 치켜세우고 잊었다. 문제는 그것이 외국인이 많은 글로벌 스타트업 '김즈'에선 금기된 손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솔선수범 미국팀 누군가의 고발로 애라는 김 이사의 유리방에 즉시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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